중앙공원의 아침
중앙공원의 아침
  • 김일복 시인
  • 승인 2023.08.2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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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김일복 시인
김일복 시인

 

노랑나비가 화장실 앞 벤치에 앉아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고, 예쁜 속옷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바람을 타고 놀고 있다.

그리운 고동색, 하늘색, 풀빛, 잿빛 그리고 어린 새싹 빛과 병아리 빛이 속옷 사이로 일렁인다. 중앙공원에 아침은 인공적이지 않아서 좋다.

이른 아침부터 천년고도가 살아있는 충청 병마절도사영이 있던 옛 관아 터에 어지간히 살아 온 사람들이 모여 아침 소리를 낸다. 윷놀이 준비를 하는 것이다. 편 가르는 일은 없다. 서너 명이 한 번 던져서 이기는 숫자가 높으면 먹는 게임이다. 반칙이 있을 수 없다. 서로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기회를 얻는다. 공동체의 번영이 춤춘다.

아침으로 오는 동안 피어나는 새싹이 싱그럽다.

퍼런 공원을 휘젓고 다니는 노랑나비가 휠체어 탄 사내와 커피를 마신다. 한 잔에 1,500원이다. 코로나 전에는 1,000원이었는데 모든 물가가 올랐다. 커피를 마시며 초록의 아침 속에서 줄지어 이발사의 손짓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바래지도 빛나지도 않은 인간다운 아침이 예쁘다.

망선루 앞에는 청주 의료원에서 의료 봉사를 나왔다. 책상과 의자를 갖다 놓으며 의료 상자를 나르는 모습이 매우 다정하다. 그들의 헌신적인 사랑이 보인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가운데 아직도 일어나지 않는 빈 소주병이 있다. 먹다 남은 빵, 누워있는 물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장단에 맞춰 흥얼거리는 사람들, 자연 그대로 촉촉하게 설레는 아침이다.

우리는 천 년이 된 아침을 지금 똑같은 아침 안에서 옷을 벗고 서 있다. 불청객으로 매일 아침을 만나는 동안 지구의 표면은 냉각되었다. 한여름처럼 더운 아침을 보내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중앙공원의 아침은 달랐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아무것도 채우려 하지 않고, 잃어버린 시간도 없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향기가 나는 소중한 아침이었다.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기 전에 어김없이 아침은 온다. 너무 고민하지 말자. 어차피 살아가게 된다. 내가 보는 아침은 다 같은 아침일 뿐이다.

아침이 오지 않으면 어제의 아침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다 같다. 남보다 내가 잘났든, 못났든 살아가는 일은 다 같다. 아침 안에서 타인의 눈치를 보지 말고 나를 받아들이고 정화하면 된다.

가치나 존재에 대해서도 아침은 물어보지 않는다. 아침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아침으로 온다. 아침은 변하지 않는 늘 같은 아침이다.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똑같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이슬을 먹는다. 서로 다른 아침을 만나서 어제의 아침을 지우고 싶어도 아무런 인연이 없다면 아침을 물리칠 필요가 없다. 짧은 아침이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침이 두려운 적이 있다. 미래가 없는 시간처럼 잠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에는 술을 먹고 종일 잠만 잤다. 세상과 싸울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내 살을 깎아 먹었다. 한때 나의 게으른 아침이었다. 돈도 명예와 사랑도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은 똑같다. 그런가? 욕심 없는 아침의 온기를 간직하기로 한다.

중앙공원의 아침은 평범하지만, 어쩌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변하거나 좋아질는지 모르겠다. 내가 본 아침은 그냥 피어나는 물꽃이다. 그래서 색이 없다. 윷놀이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나비는 매일 다르지 않은 아침이다. 아침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 아침으로 족하다.

다른 아침이라고 해 봐야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은행잎이 떨어지는 거 외에는 다르지 않은 아침이다. 아침은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래서 가까이서 보고 멀리서도 보아야 한다. 그래야 나의 아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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