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빙(禁氷)
금빙(禁氷)
  •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 승인 2023.08.1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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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반지아 청주초롱꽃유치원 행정부장

 

어느 날, 퇴근하고 아이들 저녁을 챙기는데 몸이 심상치 않았다. 어디가 아프다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아팠다. 식은땀도 나고 심장도 평소보다 빨리 뛰었다. 혹시 몰라 열을 재보았더니, 체온계가 붉은색을 띠었다. 전신이 고열로 펄펄 끓고 있었다.

깜짝 놀라 응급실로 향했고 코로나, 독감, 염증 검사 등등 수많은 검사를 했지만, 결과는 원인불명 고열이었다. 원인불명이라니,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귀가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나는 아주 사소하지만 중요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평생을 빈혈을 앓으면서 빙(氷)식증에 고통받으면서도 철분제는 극도로 싫어했던 내가 철분제를 먹어보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고열이 빈혈 때문에 발생한 건 아니었을 텐데 그날 갑자기 응급실로 가면서 본능적인 위기감이 싸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렇게 철분제를 하루, 이틀 먹기 시작했지만 30년을 넘게 모자랐던 철분 수치가 하루 이틀에 오를 리는 없었다. 철분제를 먹으면서 얼음도 같이 씹는 날들이 반복되었지만 나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변화는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아침마다 얼음으로 가득 채워 나와도 오전이면 텅 비었던 텀블러에 조금씩 얼음이 남기 시작하더니, 늦어서 텀블러를 못 가지고 나오는 날도 전혀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손 씻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500mL 컵에 얼음을 가득 담아 깨물어 먹으면서 아이들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얼음이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물론 저번 주까지 기승을 부리던 폭염 때문에 더위를 참지 못하고 얼음을 찾을 때는 종종 있었지만, 습관처럼 얼음을 찾는 경우는 없었다는 의미이다.

지난 30년간, 지나치게 얼음을 많이 먹는 나를 보며 “혈관에 문제 생긴다.” “치아 다 상한다.” “몸이 차면 없던 병도 생긴다.” 등등 수많은 걱정스러운 조언 및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꿋꿋이 먹어왔던 얼음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아무 스트레스 없이 금빙(禁氷)을 하게 되다니.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사라는 말이 가슴 깊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나치게 얼음에 집착하던 나의 모습이 몸에 철분이 결핍되어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얼음을 진짜 좋아한다.” “나는 속에 열이 많은 사람이라 얼음이 끌리는 거다.”라고 자기 암시까지 하며 헛된 집착을 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시간을 두고 가만히 돌아보면 사실 이뿐만이 아니라 애써 진실을 외면하며 스스로 무의미하게 집착을 이어가는 것들이 삶의 전반에 걸쳐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안에는 나 자신을 중심으로 가족, 친구, 인연, 지인까지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뒤엉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암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꼬인 실타래는, 내가 어떤 사소한 날 만들어 낸 결심으로 너무도 쉽게 풀어진 것처럼, 예상치 못하게 가만히 손을 놓아야겠다고 느껴지는 `때'가 온다. 그때가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정말 귀한 기회다. 그 기회를 아무도 놓치지 않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나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았던 입에서 얼음이 부서져 나가는 소리가 남에게는 소름 끼치게 싫은 소리일 수 있었겠다고 깨달았기에 내 옆에서 참아주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와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앞으로는 아주 조용할 거라는 약속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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