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간 엘리트 양성 … 혁신 교육기관
300년간 엘리트 양성 … 혁신 교육기관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3.08.09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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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보물 프로젝트 청주의 교육유산
③ 청주 최초 서원·사립학교 신항서원
사물 이치·인간 본성 탐구 주안점 두고 학문 정진
대안교육 각광- 숙종 이후 무분별 난립 교육기능 쇠락
문화재 활용 다양한 사업 추진 … 전통교육·문화의 장
2005년 신항서원 모습.
2005년 신항서원 모습.

450여 년 전 낙가산 자락에 청주의 첫 서원이자, 첫 사립학교인 신항서원(유정서원)이 문을 연다. 교육과 학문을 탐구하는 교육기관으로 서원이 청주에도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조선 초기 관학인 향교의 득세 속에 개교한 신항서원은 비록 작은 보폭의 출발이었을지 몰라도 지방교육의 주체가 국가에서 개인으로 전환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청주 교육사에 새로운 시작점이 된 신항서원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왔을까. 16세기 혁신적인 교육기관으로 주목받게 된 서원은 향교와 달리 도심을 벗어나 산수가 빼어난 한적한 곳에 세워졌다. 특히 충청도 서원은 대부분 산자락 끝에 지었는데 이는 출세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학문에 정진하기 위함이었다.

신항서원 역시 청주의 동쪽 산자락 끝에 있다. 이정골로 가는 좁은 샛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신항서원을 만날 수 있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을 대신해 600년도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비탈진 언덕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채 오가는 사람을 맞이한다. 신항서원의 역사가 나무의 역사가 아닐까 싶다.

외삼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가장 먼저 모정비각(廟庭碑閣)이 우뚝 모습을 드러낸다. 앞마당 중앙에 배치한 모정비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이 신항서원의 내력과 배향 인물, 임금이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리는 과정을 글로 지어 새긴 것이다. 연고도 없이 청주향교와 신항서원에서 만나는 송시열의 흔적은 화양서원이 아니더라도 그가 당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진 학자고 정치인이고 세도가였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묘정비각 뒤에는 강학 장소인 계개당(繼開堂)이 있다.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방을 들인 이 건물은 스승과 제자들이 숙식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대청마루에 오르니 삐걱거리는 나무 부침과는 달리 계개당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 아래 풍경이 옛 그림자를 끌고 고즈넉이 들어온다. 상전벽해란 말이 무색하게 학문만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길 바라는 스승의 고매한 품격이 강학 공간에 깃들어 있다.

계개당 뒤쪽에는 제향 공간인 대성전이 나온다. 이이와 이색 등 당대 최고의 학자 9분을 모신 성전은 신항서원의 위상 그 자체다. 배향 인물을 통해 청주지역 문중과 학맥의 상관관계도 엿볼 수 있다. 또한 향교가 공자를 배향하는 것과 달리 서원은 학식 높은 우리 선조를 배향하면서 교육의 독립성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글 읽는 선비는 간데없지만 산의 지형 따라 지어진 신항서원은 주변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간을 활용해 성리학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세월의 흐름에도 고즈넉함이 깃든 신항서원은 1570년에 건립돼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기까지 300년간 청주 엘리트들을 교육하던 인재양성소였다. 유명 학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젊은 유생들에겐 특별한 기회였으니 서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배움의 장이 된 신항서원은 대안교육 공간으로 각광을 받는다.

그렇다고 영광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는 수난을 겪었고, 1642년 재건된 후 1660년 사액 되면서 유정서원에서 신항서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숙종 이후에는 서원이 무분별하게 난립하며 교육기능이 쇠락하는 원인이 되었고, 영조 때는 서원이 900개에 이르면서 부패의 온상지로 전락했다. 결국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신항서원도 훼철되었고, 1957년 재건 후 중건과 복원을 반복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300년 짧은 역사 속에서 영광과 굴욕이 반복된 서원은 조선시대에 가장 드라마틱한 공간으로 기록된다. 지방교육을 담당했던 향교의 쇠락으로 급부상하게 된 서원은 빠르게 교육 주도권을 잡으며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우뚝 선다. 하지만 혁신적 교육 기능도 잠시, 서원은 사리사욕과 붕당 정치로 지식사회가 병들기 시작하면서 철퇴라는 운명을 맞았다. 여기에 개항 이후 근대교육이 도입되면서 급변하는 교육 환경을 수용하지 못한 채 서원도 설 자리를 잃었다.

훼철된 서원이 본격적으로 재건된 건 해방 이후다. 청주의 신항서원도 뒤늦게 재건되면서 청주의 유일한 사액서원이란 명맥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청주의 사립학교로 명성이 자자했을 신항서원은 다시 150년 만에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문화재활용으로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면서 전통교육과 문화의 장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조선선비의 높은 학식과 사상을 건축물로 보여주는 소수서원과 병산서원을 탐방하다 보면 조선을 호령했던 청주의 서원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커진다. 끈질기게 살아남아 선비의 정신과 가치를 전해주는 서원이 부럽기도 하고, 충북에만 41개의 서원이 운영될 정도 사학의 부흥기를 맞았음에도 걸출한 학자 한 명 배출하지 못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연지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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