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근 거지'
'개근 거지'
  • 김금란 기자
  • 승인 2023.08.0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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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김금란 부국장
김금란 부국장

 

땀과 눈물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노력한 만큼 결과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땀과 눈물에 비례한 만큼 손에 쥘 수 있는 것보다 얻지 못하는 게 더 많았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개천의 용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엔 수저 계급론이 등장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수저론은 부모의 자산 규모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로 사람을 나눈다.

땀과 눈물이 아닌 비빌 언덕인 부모나 조부모의 배경에 따라 수저 색깔이 달라진다.

요즘은 초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개근 거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개근 거지'는 학기 중 교외 체험 학습으로 외국여행을 가지 못한 `형편이 어려운 아이'를 뜻한다. 여행 갈 형편이 안 되니 학교를 꼬박 나왔다는 뜻이고 개근 자체가 가난한 형편임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수단이 된 것이다.

청주 모 초등학교는 올해 졸업사정위원회를 열어 6년 개근상은 유지하되 6년 정근상과 1년 개근상은 없애기로 했다.

위원회에 참여한 교사들은 야외 체험학습은 출석 일수로 인정하면서 건강상의 이유로 등교하지 않은 것을 결석처리하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했다.

40~50대는 기억한다. 학업상보다 개근상이 가치가 더 있음을 알고 있었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몸이 아파도 학교는 무조건 등교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최근 만난 지인은 “우연히 옛 물건을 정리하다가 초등학교 6년 개근상, 중·고등학교 6년 개근상을 발견했는데 가슴이 뭉클했다”며 “요즘 같으면 개근 거지인데 왜 성실함이 거지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개근 거지' 외에도 부모의 경제력으로 계층화한 혐오 표현은 주거 공간을 두고도 주거(주공아파트 거지), 휴거(휴먼시아 거지), 전거(전세 사는 거지), 월거(월세 사는 거지), 반거(반지하 거지), 빌거(빌라 거지) 등 수두룩하다.

스페인 여행길에 산티아고길을 걸었다는 지인은 그곳에서 유독 한국 대학생이 많은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대학생 몇 명에게 물어보니 “산타아고길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취업 시 스펙으로 활용한다”는 답변을 듣고 놀랐다고 한다.

한국경제학회에 게재된 논문 `우리나라 노동시장에서의 흙수저 디스카운트 효과'(오태희, 이장연)를 보면 부모의 재력 부족이 자녀의 고용의 질 및 임금 경로에 유의미한 음(-)의 영향을 미치는 흙수저 디스카운트 효과(Wooden-spo on Discount Effect)가 포착 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금융자산 보유 하위 25% 부모의 자녀는 상위 25%에 비해 양질의 일자리를 가질 확률이 약 8%포인트 낮고 첫 일자리에서의 임금 수준도 11% 낮은데다 근무연수가 늘어날수록 임금 격차가 점차 확대되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러한 결과는 `흙수저'에서 `금수저'로 올라설 수 있는 계층 사다리 복원을 위해 정부가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청년층 구직자의 신용제약을 완화해 노동시장 진입 초기단계부터 발생하는 격차를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성인남녀 1336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에서 성공하기 위한 조건'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90.3%가 `수저계급론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고 답했다.

`우리 사회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는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 및 재력이라는 응답비율(37.1%)이 개인의 역량(18.1%), 인맥(11.5%), 성실성(10.4%) 보다 높게 나왔다.

학창시절 급훈이었던 `근면', `성실', 비빌 언덕이 없는 이들에겐 `성실'만으로도 대접받던 그 시절이 호시절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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