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자라는 곳
그리움이 자라는 곳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3.08.0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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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한 달간 지속되던 장마가 그치자, 여름 해가 불볕을 토해낸다. 볕 아래 잠시도 서 있기 어렵지만, 나무는 이글거리는 볕을 품어 안고 묵묵히 열매를 키우고 있다. 저리 키운 열매를 가을이 되면 모두 내어주고 가벼운 몸으로 겨울 채비를 할 것이다. 그런 겨울나무를 닮은 어르신들을 나는 안다.

오래전부터 노인복지에 관심이 있어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했었다. 필요한 학과의 과목은 모두 이수해 놓았고 현장실습만 남아 있었다. 나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했던 공부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마음먹었다.

드디어 요양원 어르신들을 만났다. 그곳에는 누워계시는 분, 휠체어를 타고 자유로이 복도를 오가는 분, 중증 치매로 집에 가겠다고 잠시도 쉬지 않고 종일 출입문을 찾아 헤매는 분도 있었다.

어르신들은 식사 때나 자유 시간이면 넓은 거실 공간 원탁에 둘러앉는다. 나는 그곳에서 동화책을 읽어드리고, 함께 퍼즐을 맞추기도 한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정이 들어 이제는 내가 가면 반갑다고 환한 표정을 짓는다.

80여 명의 어르신 중에서 나는 치매에 손가락 장애가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배정받았다. 어르신을 위해 식사 때면 옆에서 도움을 드렸고, 그곳에 있는 동안 각별히 살폈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살며시 잡고 젊은 시절 어떻게 사셨는지 물어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눈도 잘 못 맞추던 할머니가 옛 기억을 더듬는가 싶더니 봇물 터지듯 지난 시간의 아픔과 그리움을 토해 낸다.

젊은 시절 할머니는 남편의 폭력이 심해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고 한다. 그런 가장이나마 밖으로만 돌아 호구지책을 할머니가 마련했던 것 같다.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는 할머니의 손이 말해주고 있다. 마디마디 다 뒤틀린 열 손가락에 할머니가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종일 목에 건 핸드폰이 울리기만 기다린다. TV에서 나는 전화기 소리나 옆 사람의 작은 벨 소리에도 당신의 핸드폰 뚜껑을 열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염없이 외친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 올 딸의 목소리를 찾느라 눈은 언제나 젖어 있다. 방금 딸과 통화를 하고도 잊어버렸기에 더 안타깝다.

다른 어르신들은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등 가족을 기다리는데, 이 할머니는 오로지 딸만 기다리신다. 알고 보니 할머니에게 자식은 그 딸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할머니 젊으셨을 때는 다산多産이 미덕인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할머니가 단지 딸 하나만 두신 것은 가장이 밖으로만 돌았던 탓이 아니었을까. 가장의 수수방관은 모녀가 서로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도록 했고, 할머니는 가장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늘 딸을 기다리며 사셨을 것이다. 할머니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였을지도 모르는 단 한 점 혈육인 딸. 망각의 세계에서도 할머니는 그 딸을 향한 애틋한 끈만은 놓지 않고 계시다.

방금 전의 일도 기억 못 하는 치매나 망각은 실로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잊어버려야 살 수 있는 일도 있다. 할머니는 방금 통화한 딸의 전화는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남편의 폭력은 잊지 못하니 너무나도 안타깝다. 이와 반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할머니를 살게 한 딸에 대한 모든 것은 기억하고, 할머니의 삶 전체를 황폐화시킨 남편과의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착한 치매라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 한 잎까지 떨구어 거름으로 묻고 겨울나무로 선 어르신들과 나는 헤어지며 포옹했다. 한 달간 실습을 마치고 돌아서는 내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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