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자의 위버멘쉬
소심한 자의 위버멘쉬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 승인 2023.08.0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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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처장

 

가끔 생각한다. 여름 초록색에 대한 쓸쓸함에 대해, 타들어 가는 햇빛을 오롯이 받아내고도 다음 날 아침엔 싱싱한 풀색으로 되살아나는 생명, 자기만의 간격 안에서 환경에 굴하지 않은 꿋꿋한 생명체를 볼 때 그것이 견뎠을 시간을 생각하면 더 쓸쓸하다. 아마도 이런저런 생활 속에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이 투사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울타리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스스로 생각한 이상형의 나를 내가 만들었다. 자신의 본래 성격은 무시하고 그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려고만 했다. 타인이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혹은 일을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내가 원하는 시간은 사라지고 조직의 잘 훈련된 부품이 되는 것이 마음 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름날의 초록을 보며 문득 연약한 초록의 잎도 제모습 그대로 살아내는 뜨거운 정오, 작렬하는 태양 아래 서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불가리아에서 태어난 마리아 굴레메토바의 작품 <울타리 너머>는 제목만으로도 마음을 멈추게 한다. 할 말이 많은 탓이다. `울타리 너머 포식자' `울타리 너머 개고생' `울타리 너머 거친 자유' `울타리 너머 더 쓸쓸함' `울타리 너머 새로운 세상' 이런저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이 잘 어울리는 여름의 나른한 오후. `know(안다)'와 `so-so(소소)'가 함께 사는 으리으리한 정원이 딸린 저택은 그림으로 보아도 빈틈이 없다. 안다는 무례하리만큼 소소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소소는 요즘 말로 `쏘쏘(그저그런 평범한)'한 직립보행의 예쁜 돼지다. 아우디가 그랬다지.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라고. 안다와 소소는 직선과 곡선처럼 좀처럼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사실이 직선이라면 진실은 곡선에 가깝다. 안다의 소소를 향한 무례함, 생활의 많은 것을 통제하며 `사랑'이나 `보호' 또는 `가족', `친밀' 따위의 곧게 뻗은 칼로 소소를 자신의 스타일로 다듬어간다. 물론 소소는 반항하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나보다.

소소는 안다의 직선에서 탈출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산들이'라는 야생 멧돼지를 만났기 때문이다. 소소처럼 꾸미지 않고 커다란 저택에 갇혀 있지도 않다. 산들이 몸엔 바람의 숨결이 묻어나 울타리 너머로 금방이라도 뛰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안다를 금세 버릴 수는 없다. 울타리를 넘어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소소는 알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는 안다와 소소가 함께 산다. 내가 원하는 모습에 나를 끼워 맞춰 큐브처럼 깔 별로 모아 가지런하고 빈틈없는 도구로 가꿔 왔다. 어쩌면 나는 어디서나 능숙하고 노련하며 유쾌하기까지 한 매너 좋고 나이스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안 어느 어두운 서랍엔 소소도 함께 산다. 좀 더 나를 나답게 가꾸고 싶지만 여기저기 거미줄처럼 걸린 관계와 상황에 눌려 작은 것부터 포기하다 보니 큰 것도 포기하기 쉬워졌다.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더라도 이제 니체가 말했던 노예도덕에서 벗어나 절대 법칙이란 없음을 스스로 상기하며 주인 도덕의 삶을 살아야겠다. 미치광이 여행가는 아니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일상도 나쁘진 않지만, 소소처럼 모든 것을 두고 훌쩍 떠날 수는 없지만, 야금야금 일상에서도 `소심한 위버멘쉬' 정신으로 살아보고 싶다. 우선 답답한 도시의 직선을 떠나 아름다운 곡선의 향연이 가득한 자연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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