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 교육·사회변화 `구심점 역할'
고려~조선 교육·사회변화 `구심점 역할'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3.08.0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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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보물 프로젝트 청주의 교육유산
② 지방 인재 교육기관 청주향교

고려 성종 6년 쯤 건립 추정 … 유교 기반 교육·제사 담당
학생 수 90명 이내·까다로운 자격요건… 입학 경쟁 치열
세종·세조 인연 - 송시열 `청주향교지' 기문 … 위상 가늠
1923년도 청주향교 모습.
1923년도 청주향교 모습.
600년 된 느티나무 아래 청주향교 명륜당.
600년 된 느티나무 아래 청주향교 명륜당.

천년 고도(古都)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는 어디일까?

초보적 교육 행위를 제외하고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 곳은 청주향교다.

청주향교가 언제 설치됐는지 명확치 않지만 `고려 성종 6년(987) 전국의 12목에 학교를 세우게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12목의 하나였던 청주에도 향교가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청주 지방교육의 모체인 청주향교는 어떤 역사를 품고 흘러왔을까. 청주향교 역사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고려 왕건을 빼놓을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까지 국학 중심의 교육이 지방 관학으로 확대된 데에는 고려 국가의 탄생 배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지방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왕권을 잡은 왕건은 불안한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호족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건은 이미 특권층으로 자리 잡은 호족들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각 지방에 향교를 설치함으로써 교육을 통한 국가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향학(鄕學)의 시초로 중앙 집권체제를 강화하려고 3경(京) 12목(牧)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해 생도를 교육한 것으로 보는 이유다.

향교가 지방재정으로 운영됐지만 고려의 지방교육제도가 완벽하게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려 왕권이 안정되기까지 지방교육이 효과를 나타내면서 고려 왕들은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관심이 높았다.

고려 성종 때 12목에 외관의 파견과 함께 경학박사와 의학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관학 설치는 지방교육과 유학의 발달로 이어졌다.

또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가 고려말까지 유지된 것도 향교 활성화에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청주향교 역시 지방교육의 변화는 물론 사회변화에 구심점 역할을 했다.

지역인재들이 자연스럽게 교육공간인 청주향교에 모이게 되면서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주체자로 부상했고, 지방호족들이 특권층으로 입지를 공고히 하는 공간이 됐다.

이는 향교 입학 자격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국학과 마찬가지로 지방 관학인 향교도 문무관 8품 이상의 아들과 서민에게만 입학을 허가했다.

학생도 90명 이내로 정함으로써 치열한 입학경쟁률을 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을 보면 `세종 때 유학 교수 1명을 두었다가, 성종 때 종6품의 교수 1인을 두고 교생 90명으로 정했다. 청주향교 학생 수는 호서승람에 68명, 호서읍지에 90명, 충청도읍지에도 90명이었다'고 전해져 청주향교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때 교육기관으로 기틀을 다진 청주향교는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교육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으로 확대되며 명성을 떨친다. 특히 조선의 두 왕과의 인연으로 청주향교는 `삼남의 의뜸'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다.

왕과의 첫 인연은 세종대왕이다. 안질과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종(1444년)은 치료 차 그해 봄과 가을 초정에 머물면서 행차로 불편을 겪는 백성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청주향교에 책 9권을 하사한다.

두 번째 인연을 맺은 왕은 세조다. 세조가 1464년 속리산 가는 길에 청주향교에 들러 친히 제사를 올림으로써 조선의 두 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설처럼 이어지고 있다.

두 왕의 인연 못지 않게 기호학파 수장인 송시열 선생이 1663년 `청주향교지'의 기문을 썼다고 하니 으뜸 중에도 으뜸이라 자부해도 무색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청주향교는 유교를 교육이념으로 제사와 교육을 담당하면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방교육기관으로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조선 후기 지방사립학교인 서원이 세워지면서 향교의 교육기능은 위축됐고, 일제강점기에 근대학교가 건립되면서 인재양성 교육기능도 쇠퇴했다.

오랜 세월의 변화를 거쳐온 오늘날의 청주향교는 어떤 모습일까.

충북도청 후문에서 대성로를 따라 걷다 보면 우암산 끝자락에 붉은 홍살문과 외삼문이 눈길을 잡는다.

도심 한가운데임에도 외도라진 이곳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청주지방 인재들을 교육하던 청주향교다. 한때 대성동 절터였던 이곳은 몇 차례 자리 옮김을 한 청주향교가 숙종 9년(1683) 현감 이언기 때 재이건 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산의 형세 따라 지어진 청주향교는 홍살문 옆에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오라'는 의미의 하마비는 학문과 학자를 숭상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삼도로 된 외삼문 계단에 올라서면 가장 먼저 명륜당이 나온다.

널찍한 강당 형태인 명륜당은 양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교실이다.

마루로 된 바닥과 굵은 서까래가 선을 이룬 천정의 무늬가 전통의 멋을 흠뻑 담아낸다. 명륜당은 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은 축소됐지만, 전통 프로그램 교육장으로 변화하며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명륜당 뒤편에는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다. 공자를 비롯한 문묘 배향 인물들을 모시는 공간답게 내삼문 계단을 까마득히 쌓아 올려 학문의 높이를 건축물로 보여준다.

이 엄숙한 공간에서 잠시 마음을 다듬게 해주는 건 대성전 언덕에서 600년 넘게 자란 느티나무다. 풍파에 휘어진 나무가 명륜당을 굽어보는 모습에서 글 읽는 수려한 젊은 선비를 떠올려 본다.

/연지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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