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김없는 불사름 - 향나무
남김없는 불사름 - 향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08.0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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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몇 시일까? 이런 벌써 날이 밝아오네? 정동향으로 난 창문이 여명을 전한다. 다섯 시 삼분. 가로등 불빛은 여전히 지난밤의 일을 끝내지 않았다. 다행인가?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 차에 오른다. 공간을 옮겨 도착한 곳에서 시동을 끄고 차 문을 연다. 공기가 다르다.

휴일 없이 일에 빠져 찾지 못한 곳은 잔디가 무척 많이 자라 풀밭이 되었다. 커다란 소나무 밑 잔디가 있어야 할 곳에는 두툼하게 초록색 양탄자가 깔렸다. 무릎을 굽혀 어루만진다. 채 마르지 않은 이슬이 손바닥을 맞는다. 살포시 누른다. 이끼가 손바닥 모양을 따라 내려앉는다. 손바닥을 들어 올린다. 이끼가 손바닥과 헤어지기 싫은지 따라 오른다. 이끼와 노는 사이 익숙한 향이 코를 건드린다. 어릴 적 칼로 연필을 깎을 때 맡던 향이다. 아니지? 살아 있는 향나무가 향을 품어내진 않잖아? 뚝향나무, 눈향나무, 옥향나무, 편백나무, 측백나무, 심지어 노간주나무까지 찾아 코를 들이대고 맡아 봤지만, 코를 건드리는 향이 아니었다. 다시 이끼가 있는 곳에 몸을 낮춘다. 향이 나질 않는다. 숨을 내쉬고 깊게 들이마셔도 향이 나질 않는다. 그냥 잠시 스쳤던 향이겠지 싶었다. 그리고 일어서려는 순간 향이 몸속으로 들어왔다.

평상시 맡을 수 없는 향이 잠결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싱그럽고 시원하고 산뜻하다. 미풍이 전하는 상쾌함의 기운에 몸이 가뜬하다. 미풍에 실려 오는 내음은? 스트로보 잣나무와 뚝향나무가 품어내는 향과 이끼가 발산하는 산소이온의 결합인 듯. 한동안 자리를 뜨질 못한다.

몇 년간 내버려 뒀던 향나무가 볼품없이 자라, 수형을 잡으려고 강하게 가지를 잘랐다. 겉보기엔 부드럽게 보이던 잎은 바늘 같았다. 인정사정없이 찌른다. 나름의 반항일까? 바늘로 찌르듯 대항하며 품어내는 향은 테르펜 냄새다. 자른 나무는 버리지 않고 한 곳에 모아 두었다. 굽이치듯 기이하게 자란 나무줄기가 멋있기도 하고, 무엇인가 만들 수 있을 듯하고, 향불이라도 피워보려는 심산이었다.

오래전 잘라 놓았던 나무줄기를 칼로 삐친다. 날카로운 칼날에 향나무 줄기에서 나무 비늘이 되어 날아 내린다. 낙엽이 쌓이듯, 커다란 덩치의 나무줄기에서 삐친 것들이 소복하다. 한 줌 집어 향합에 넣고, 몇 개를 집에 불을 붙인다. 불이 닿자마자 연기를 피운다. 눈에 보이는가 싶었는데 코를 통해 허파에 다다른 듯하다. 내장 곳곳에 향이 가득하다. 온몸이 향으로 뒤덮였다.

불을 사른 향이 향로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정중앙에 자리 잡아 정좌하고 향은 멈추지 않는다. 향로뚜껑을 덮는다. 뚫린 공간으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향이 온 공간을 채운다. 공기의 흐름이 연기의 궤적을 그리며 율동을 그린다. 연기 속에서 향에 취했는지 움직이질 못한다. 내 움직임이 외려 율동을 깰까 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향목에 불을 사른다. 가늘게 쪼개진 끄트머리는 참숯에 달궈진 쉿 덩인 듯하다.

오랜 세월 더디게 자란 나무가 마지막의 생을 향으로 남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공기의 흐름과 함께 호흡하며 껍질을 더했다. 자라면서 커다란 나무가 되어감에 바람을 맞이하며 뒤틀리고, 무게를 감당하려 안간힘에 쳐졌다.

모질고 끊임없는 외압과 괴롭힘에 참(忍)으며, 세월을 더해가며 바늘 같은 잎은 비늘 같은 잎(仁)으로 만들었다.

이제 껍질을 벗는다. 향을 피운다. 살아서 품어내던 향이, 불을 살라 피운 향이 다를 리 없건만, 죽어서 피워내는 향은 더 강한 듯하다. 자신을 불사르며 최후의 향을 품어내는 것일까? 더 진하고 가슴 깊이 파고든다.

베어지고 삐쳐 불에 사른 향은 말 차시 한 숟가락도 안 되는 재를 남겼다. 이내 그 작은 흔적마저 바람에 흩날린다. 결국에 향은 가슴 깊이 스며들고 한 줌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불사른 향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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