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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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억수 시인
  • 승인 2023.07.3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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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심억수 시인
심억수 시인

 

끈적끈적 들러붙는 한여름 무료(無聊)를 달래기 위해 TV 채널을 탐색하던 중 인생 정원 다큐 프로그램에 시선을 멈추었다.

여백서원을 관리하고 괴테 마을을 운영하는 전영애 교수의 인생철학이 재방영되고 있다.

전영애 교수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였다. 지금도 서울대 명예교수다. 세계적인 괴테 연구가이다. `파우스트', `데미안' 등을 번역한 이름난 번역가이다.

전 교수는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낯에는 정원에서 3인분 노비처럼 삽을 들고 땅을 가꾼다. 밤에는 책을 읽고 번역하며 시간을 경작한다. 전 교수는 글을 쓰다 머리가 아프면 무조건 정원으로 나간단다. 정원 일을 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단다. 땅 위에 몸으로 시를 쓰는 것처럼 벅찬 희열이 차오른단다.

전 교수는 괴테가 60년에 걸쳐 썼다는 파우스트를 40년을 읽고서야 번역했단다.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역작이란다.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 삶의 열정을 가져왔단다. 올바른 목적을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바르게 산다고 꼭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칠십여 년 바르게 살아봤더니 바르게 살아도 괜찮단다. 바르게 사세요. 전영애 교수의 마지막 메시지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다큐를 시청하는 동안 가슴이 벅찼다. 무작정 여백서원을 향해 갔다.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TV로 본 풍경보다 더 정갈하다. 어린이 도서관을 지나 본관을 향해 가는 길에는 제각기 사연을 간직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대문은 열려 있는데 인기척이 없다. 뒤뜰 정원에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나무가 여름 오후 햇볕에 졸고 있다. 잔디밭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아담한 한옥 정자가 있다. 전 교수가 시를 짓고 낭송하며 시정(詩情)을 움트는 곳이다. 쪽마루에 앉아 정원을 감상하며 TV에서 인터뷰하던 전영애 교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여름 볕에 졸고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놀란다. 상큼한 녹색 내음이 콧등에 앉는다. 오수를 즐기는 여백서원의 풍경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행운이다. 전영애 교수와 마주쳤다. 독일을 다녀오는 길이란다. 꾸미지 않은 백발의 전 교수는 처음 보는 나를 맑은 미소로 맞아 준다. 여독이 풀리지 않았을 텐데 귀찮은 내색도 없다.

여백제로 안내하며 내부 공간을 설명한다. 글이 몹시 귀하던 시대를 증언하는 전래의 필사본도 보여준다. 누구나 서원에서 독일 문학 도서와 괴테 작품을 읽을 수 있단다. 전 교수의 꿈과 열정이 가득한 여백제를 둘러보고 괴테 마을로 향했다.

괴테 마을은 우리의 소망이란 우리들 속에 있는 능력의 예감이라는 괴테의 문장에서 시작되었단다. 괴테를 통해 꿈이란 허황된 게 아니며 우리 안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단다.

젊은 괴테의 방에는 6000권의 책이 주제별로 진열되어 있다. 삶을 가르쳐준 것들, 고전의 지혜에서 찾는 길, 세계문학전집, 나의 일상에 건네는 안부, 늘 꿈과 늘 사랑하기 등 테마로 구성됐다. 누구나 가끔 숲 속 괴테 마을에 와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단다.

독일에서 막 귀가한 여독도 잊은 채 전 교수는 `괴테 마을'의 꿈을 들려준다. 사랑이 바탕이 된 전영애 교수의 바른 삶을 되새기며 늘 새로워지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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