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근대교육 활발 … 교육도시 명성
1894년 근대교육 활발 … 교육도시 명성
  • 연지민 기자
  • 승인 2023.07.26 1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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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보물 프로젝트 청주의 교육유산
① 청주는 교육도시일까?
용두사지철당간 돋을새김 명문 학문적 수준 증명
금속활자본 직지·고려 공민왕 망선루서 과거시험
세종대왕 `통감훈의' 하사 등 인재양성소 역할도
갑오경장 후 초·중등교육기관 설립 민족교육 앞장
망선루를 학교로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기념사진(1930년대)
망선루를 학교로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기념사진(1930년대)
국보41호 용두사지철당간, 용두사지철당간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명문.
국보41호 용두사지철당간, 용두사지철당간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명문.

청주시를 대표하는 이미지와 `교육'을 떼어놓고 얘기하기 어렵다. 언제부터 불리었는지는 모르지만 `교육의 도시 청주'는 지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그 만큼 청주엔 교육 관련 기록이나 근·현대 유산이 많다. 하지만 정작 청주시민들에게 청주를 대표하는 교육유산을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은 “글쎄요”인 경우가 많다. 이에 충청타임즈는 `다시 찾은 보물 프로젝트 - 청주의 교육유산'을 심층 보도한다. 천년고도 청주가 교육도시로 명성을 얻기까지, 오랜 청주역사 속에서 교육도시임을 증명하는 교육문화유산을 10회에 걸쳐 보도한다.

청주의 교육유산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청주가 교육도시일까?'가 첫 질문이다. 2000년 이후 서울 중심의 교육이 강화되면서 `교육도시 청주'의 상징성도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전국에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고, 서울이 일류대학으로 각인되면서 청주시민 스스로도 교육도시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내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청주가 오랫동안 교육도시로 불린 데에는 단순히 인구대비 학교와 학생 비율이 높았던 이유만은 아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근대학교교육이 활발해지면서 청주가 교육도시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지만, 역사 속 갈피마다 청주만의 교육 DNA들이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어 교육도시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 첫 퍼즐 조각으로 국보 41호인 용두사지철당간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광종 13년(962)에 만들어진 이 철당간은 천 년 세월을 청주사람들과 함께한 유물이다. 급변하는 역사의 물결을 이겨내고 여전히 도심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철당간은 종교적 의미 그 이상이다. 특히 철 기둥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명문은 당시 청주의 학문적 수준은 물론 기술 역량까지 증명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이는 청주가 금속활자 주조 역량과 더불어 책의 도시로 주목받게 된 현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와 단단한 교육의 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 고려 공민왕이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청주에 머물면서 망선루에서 과거시험을 시행함으로써 교육유산을 소중히 간직하며 문화로 꽃을 피우는 근간이 되었다.

청주교육의 맥은 조선시대로 넘어와 향교와 서원, 서당으로 이어지며 인재 교육이 활발해진다. 청주향교는 세종대왕이 1444년 초정에 머물며 `통감 훈의' 등 9권의 책을 하사해 삼남의 제일 교육기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런가 하면 율곡 이이는 1571년 청주목사로 부임해 `서원향약'을 집필했고, 성리학의 대가 송시열은 화양서원을 중심으로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뤄 청주가 중앙정계 진출을 위한 인재 양성소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충북은 41개의 사립 서원이 운영될 정도로 교육 부흥기를 누렸지만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이 내려지면서 모두 없어지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이어진 조선의 멸망과 한국의 근대기인 19세기는 문명의 신구교체기였다. 사회는 낡은 봉건적 구습에서 벗어나 신학문과 문물제도를 받아들였고, 교육은 유교적 전통교육에서 탈피해 서구의 신교육과 신학제가 도입돼 전환기를 맞았다.

청주시에서 발간한 `통계로 보는 청주 60년사'에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신분제도가 폐지되면서 근대 학교교육이 활발해졌다. 청주도 초등교육기관으로 청주공립보통학교(1907·현 주성초)를 시작으로 대성보통학교(1924) 청주제2공립보통학교(1935·현 교동초)를 설립하였고, 중등교육기관으로 공립농업학교(1911), 청주공입고등보통학교(1924), 청주상업학교(1935), 청주사범학교(1941)를 잇따라 설립해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또한 3·1운동과 1929년 항일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가 위기에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해 청주의 기개를 드높였다. 1945년 해방 후에 홍익인간의 교육이념과 새로운 교육제도 도입으로 교육발전에 노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1960년대까지 청주 공간에서 이루어진 교육과 교육유산의 서사는 교육도시로 차곡차곡 쌓아온 조각들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인재양성을 통해 얻은 교육도시의 명성을 방증하듯 청주 곳곳에는 다양한 교육유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찾은 보물 프로젝트는 청주 교육유산을 찾아가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연지민기자
annay2@cctimes.kr



2023 청주 문화도시 조성사업 '다음 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 다시 찾은 보물'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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