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7.2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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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20대 초등학교교사가 자신이 근무하던 교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생님이 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임용고시에 합격했을 때는 온 가족이 함께 기뻐했을 것이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첫 출근을 했을 것이다. 훌륭한 선생님이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홀로 품었을 것이다. 그 푸르던 기개를 무너뜨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학부모의 갑질 때문이라는 교원단체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이즈음의 교육현장을 보면 그녀의 고뇌가 무엇이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에너지 뱀파이어란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에너지를 빨아들여 지치고 고갈된 느낌이 들게 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녀의 심장에도 수많은 에너지 뱀파이어들이 이빨을 꽂고 그녀의 푸른 기운을 뽑아 먹었을 것이다. 그녀가 모든 에너지를 잃고 쓰러진 후에야 슬그머니 이빨을 감추고 자신은 아니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을 것이다.

친구 몇 명이 동남아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캐리어 끌고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설렘 폭발이었는데 여행지에 도착하면서부터 그 환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친구 중 한 명이 계속 불만을 쏟아 낸 것이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숨을 쉴 수가 없다. 호텔 시설이 최악이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지 않는다고까지 불평을 늘어놓았다.

여행지에서 느껴야 할 감동의 순간을 그 친구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계속해서 깨트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기분은 한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충고랍시고 잔소리를 자주 하게 된다. 그러다 얼마 전 딸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면 기운이 빠진다는 것이다.

때마다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가끔은 모르는 척 지나가 주는 것이 더 고마울 거라는 것이다. 딸이나 되니까 엄마에게 항의를 했지 나의 어쭙잖은 충고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나 또한 그들의 명랑한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이 된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지갑만 열고 입은 닫으라는 말이 나온 듯하다.

우리가 아는 뱀파이어는 뾰족한 이빨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 맞닥뜨리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 뱀파이어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온몸의 에너지를 다 뺏길 때까지 에너지 뱀파이어의 먹이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피해자들이 그렇고 JMS기독교복음선교회 같은 사이비종교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렇다.

에너지 뱀파이어는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 마음이 약해서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옳다구나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내 생활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 나를 자꾸 초라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의 기운을 뽑아먹는 에너지 뱀파이어는 아닌지 생각해 보고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우리 딸처럼 그러지 말라고 항의라도 해야 할 것이다.

사방이 어려운 사람뿐이기만 했던 초보선생님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 참다가 더는 참을 힘이 없어지자 안타까운 선택을 했을 것이다. 교권이 바로 선 좋은 세상에 가셨기를 빌어 볼밖엔 이제 우리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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