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랄 수 없는 녀석 - 머위
나무랄 수 없는 녀석 - 머위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07.1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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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사방이 온통 깨밭이다. 몇 년간은 깨 모종을 심은 적이 없다. 씨를 뿌린 적도 없다. 그런데 고랑이고 이랑이고 갖가지 나무가 자라는 화분에서, 심지어 돌 틈이나 깨진 시멘트 사이에도 깨가 줄지어, 뭉텅이로 자라고 있다. 깨를 비집다 보면 깻잎 향이 옷에 밴다. 연이은 비에 대는 굵어지고 짙은 색으로 급변한다. 꽤 잘 자라는 깨다.

큰 바위 얼굴만 한 잎의 머위가 깨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기세등등하게 쑥쑥 자라는 깨 사이로 머위가 안간힘을 다해 틈을 벌리고 있다. 커다란 잎을 펼쳐야 하는데 들 깻대가 자리를 내어주질 않는다. 이슬을 먹던 힘까지 다해 태양을 바라보며 잎을 내밀고 있다. 역부족이다. 들깨의 키가 너무나도 많이 컸다. 담 밑으로 기어들어 가, 보도블록 틈으로 순을 올린다. 올라오면서 피가 맺었는지 순이 붉다.

그러나 모든 틈 사이로 순을 올릴 수 없는 터, 상황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돌미나리밭으로 진행 방향을 틀었다. 그곳에선 돌미나리보다 키가 크니 구태여 비집고 올라갈 필요가 없다. 잔뿌리를 내리고 순을 올리기만 하면 된다, 돌미나리 위로 삶의 날개를 맘껏 펼친다. 돌미나리에는 멋진 그늘이 되어준다. 멋쩍은 존재의 머위다.

들깨와 머위, 돌미나리가 한데 엉켜 있다. 무슨 작물을 키우는 밭이냐고 묻는다면 그냥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 경쟁하며 크는 곳이라고 대꾸할 수밖에 없다. 그저 채취만 하는 곳이라 구태여 갈아엎을 필요도 물을 주지 않아도 되는, 다른 작물과 뒤섞여 반경을 키워가며 자라는 또 하나의 숲이라 억지를 부린다. 한 포기 들깨에서 씨가 떨어지며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김밥의 재료로, 삼겹살에 쌈장 올려 쌈 싸 먹을 때, 들기름에 볶아 무쳐 먹던가, 쪄서 무쳐 먹던가, 장아찌를 만들던가 하는 반찬으로, 라면에 넣어 먹을 때 쓰려고 몇 포기 남겨 놓았는데, 뽑아낼 시간을 놓쳐 이젠 관리하기 벅찬 상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이 녀석들이 처치 곤란한 대상인 건 아니다. 다른 녀석들에게 피해가 갈 정도가 아니면 구태여 뽑을 일이 없다. 나름 터잡고 자라는데 그냥 같이 사는 거지 뭐, 그렇게 스스로 위안 삼아 보지만 많아도 너무 많다. 빼곡하게 자라다 보니 다른 녀석들은 자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다. 그 틈으로 머위가 머쓱하게 올라와 있다. 참으로 볼품없다.

머위 뿌리가 땅 밑에서 사방으로 뻗으면서 세력을 넓혔다. 빛 한 줄기 없는 흙 속에서 쉼 없는 나름의 질주였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 중간중간 잔뿌리를 내리고 순을 올렸다. 흙 밖으로 순을 올리고 그간의 수고로움의 빛을 땅 밑으로 전했다. 그리고 그 빛을 에너지 삼아 또 달렸다. 한 모금의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잠영하듯 길이 없는 흙 속에서 길을 터 나갔다. 흙 위의 세상은 늘 커다란 밀림 같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라 올라가지 않는 게 아니다. 엄청난 꽃을 피우고 화려한 꽃으로 새와 벌과 나비를 불러들일 만한 능력이 없고, 땅속으로 뿌리를 뻗는 태생이어서 그렇다.

어두운 흙 속에서 끊임없는 숨을 고르며 살지만, 많은 것들의 뿌리가 엉켜 있는 듯하지만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자라고 있다. 온전한 자신만의 영역이 있지는 않지만, 많은 것들과 얼기설기 엉켜 나름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해를 거듭하며 순을 틔우고 영역을 넓히는 녀석, 나무랄 수 없지만, 나무보다 더한 생명력을 가진 녀석이다. 온전히 자신의 생존방식으로 특화되어 많은 것들과 어울려 자라고 있다. 때론 영역싸움에 경쟁을 벌이지만, 다른 것에 해를 가하지는 않는다. 틈이 있으면 틈을 찾아 자리하고, 베어지고 짓밟혀 흔적이 지워진 듯하지만, 뿌리만큼은 늘 살아있다. 척박하거나 비탈지든 개의치 않는다. 가뭄이나 폭우에도 잠시의 머뭇거림이 없이 한치의 후퇴도 없다. 늘 정진하고 전진할 뿐, 그래서 나무랄 수 없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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