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포도
여우와 포도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7.1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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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솜씨 좋기로 소문난 미용실이 있었다. 미용실은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렇게 잘 나가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원장에게도 고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남편이었다. 원장의 남편은 부인의 능력만 믿고 일체의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 시쳇말로 아내 등에 빨대를 꽂고 산 것이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생각한 원장은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 남편과 계속 살아야 할지를 물어 보았다. 부부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원장의 사주는 거지 사주인 반면 남편의 사주는 가만히 있어도 복이 굴러오는 사주라며 남편을 꼭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거지팔자인 원장이 남편 덕에 재복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었다.

원장이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여전히 안방에서 뒹굴고 있는데 예전처럼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더란다.

여기까지가 친구가 내게 해 준 이야기이다. 그런 미용실이 진짜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끌어안고 있기엔 너무 벅찬 근심거리도 마음먹기에 따라 작아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 것 같다.

귀도 얇고, 경제관념도 별반 없는 나는 피같이 번 돈을 순식간에 까먹는 사고를 한 번씩 치곤한다.

`그 돈을 어떻게 벌었는데…'라는 생각을 하면 잠도 오지 않고 입맛도 딱 떨어진다. 그 암울한 상황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 모든 일을 액땜으로 치부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무서운 사고를 돈으로 때웠다고 억지를 쓰는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날 수 있는 건강의 위기, 사고의 위기를 이것으로 때워버렸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돈으로 때우는 게 낫지' 하는 뻔뻔한 생각이 든다. 해결할 방법을 못 찾으니 그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었던 것이다.

배고픈 여우가 포도나무 밑을 지나게 되었다. 잘 익은 포도를 보고 마음이 급해진 여우는 포도를 따먹기 위해 힘껏 뛰어 올랐다. 그러나 포도송이는 닿을 듯 닿을 듯 여우의 애만 태우고 잡히지 않았다. 주둥이를 쭉 내밀어 봐도 까치발을 들어봐도 딸 수가 없었다.

기진맥진한 여우는 포도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저 포도는 아직 덜 익어서 맛이 없는 신 포도야. 안 따 먹길 잘했어.”

여우와 신 포도라는 이솝우화의 한 장면이다. 이 우화의 주인공 여우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선이 더 많다. 잘 익은 포도를 신 포도로 매도함으로 부족한 자신을 합리화 시켰다는 것이다. 더 노력하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흔히들 포기란 말은 배추 셀 때나 쓰라고 한다. 유머 같지만 포기가 쉬운 우리네에게 주는 일침일 것이다. 그러나 이젠 어떤 목표를 위해 그렇게까지 나를 닦달하고 싶지가 않다. 나한테 조금은 관대해지고 싶다. 나이 들어감의 좋은 점은 포기할 수 있는 건 포기해도 큰 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잘 익은 포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면 여우는 그 포도나무 밑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저 포도는 신 포도라는 억지 최면을 걸었기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포기가 쉬웠던 걸 보면 어쩌면 그 여우도 나만큼의 나이가 들지 않았나 싶다. 몇 번 뛰어보고 기진맥진해서 포도를 포기한 걸 보면 진짜 그랬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꼭 내 모습 같기만 한 우화 속 여우가 가지가 얕은 다른 포도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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