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의거 또 한 분의 영웅 우덕순 의사를 그리며
하얼빈 의거 또 한 분의 영웅 우덕순 의사를 그리며
  • 김명철 제천교육장
  • 승인 2023.07.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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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제천교육장
김명철 제천교육장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안중근 의사를 꼽는 분들이 많다.

그만큼 그분의 삶과 업적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이 크고 위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국의 안위와 세계평화를 위해 엄청난 일을 했고, 옥중에서 보여준 안 의사의 모습은 민족의 큰 어른임에 틀림이 없다.

그 엄청난 일이 바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와 함께 민족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노력했던 또 한 분의 영웅이 계신다.

바로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호는 단운(檀雲)을 쓰는 충북 제천 출신의 우덕순 의사이다. 우덕순 의사는 제천에서 태어나 어릴 때 서울로 상경하여 동대문 부근에서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외로 나가 국권회복 투쟁을 하였다. 그해 겨울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을 통해 민족구국운동을 하였다.

그 후 1907년에는 안중근, 이범윤과 함께 의병을 양성하였다. 자신이 양성한 300명의 정예 용사와 함께 1908년 국내에 잠입하여 함경북도 경흥, 회령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교전하다 안타깝게도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함흥 감옥에 감금 되었으나 탈옥에 성공하였다.

1909년 봄 노우키에프스크[연추(煙秋)]에서 안중근, 김기열 등의 동지들과 손가락을 끊는 단지동맹을 결성하였다.

그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 피탈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하기로 하고 모든 준비와 거사, 그리고 이후의 행동도 함께하기로 맹세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지역을 순방하는 이토를 처단하기 위하여 우덕순은 차이자거우 역에서 대기하고,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대기하였는데, 이토가 탄 기차는 차이자거우 역을 무정차로 지나쳐 하얼빈 역에서 정차하였다.

이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우 의사는 이토를 저격할 기회조차 얻지 못해 땅을 치고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현장에서 체포된 후 우 의사도 공범자로 체포되어 뤼순에서 함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징역 3년 형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옥고를 치르던 중 과거 함흥 감옥에서 탈출한 사실이 드러나 2년의 형량이 추가되어 5년의 형을 살고 1915년에 출옥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에서 교육·종교 사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에 힘썼고, 광복 후 헤이룽장성의 한인민단 위원장이 되어 아들 대영과 함께 동포들이 안전하게 그리던 고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동포들을 수송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귀국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을 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그해 9월 26일 북한군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묘소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필자는 8월 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안중근 의사의 정신과 얼이 담겨있는 옥중 유묵을 서각해서 의병의 고장 제천의 모든 학교에 기증, 전시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와 우덕순 의사의 의병 정신인`나라사랑 정신과 세계평화 사상'이 제천의 모든 학교 학생들 가슴 속에 살아 쉬기를 소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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