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小素)한 재미
소소(小素)한 재미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3.07.16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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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절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소소한 재미가 없을 수 없다. 절 생활 초창기 30분 앉아 있기도 어려울 때 주로 걸었다. 아침 30분, 저녁 30분 앉아 있는 흉내를 내고 나면 종일 할 일이 뭐 있겠는가. 무작정 걸었다. 이런저런 길을 걷다 보면 신기한 곳이 눈에 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에 문학 카페가 있다. 실제로 손님도 없는 데 아직 있다.

어느 동네에 가니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정원 같은 곳이 있는데 담이 없다. 전원주택 겸 사업장 겸 지어놓은 곳인데 정원을 꽤 넓게 조성해놓고 담을 치지 않았다. 입구에 널찍하게 연꽃 연못이 있다. 조심스레 들어가 보니 잔디밭에 테이블, 의자가 갖춰진 대형 비치파라솔이 두어 군데 있다. 빙 둘러 조그만 연못들이 있고 군데군데 탑들, 조각들이 있고 꽃나무들도 있다. 들어가서 쉬는 동안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돌아보고 머물다 나오는 동안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다. 몇 번 드나드는 동안 주인아줌마를 한 번 봤는데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묻고는 끝이다. 이곳은 가을에 가면 좋다. 노란 잔디밭에 가을 햇살이 비치는데 비치파라솔 아래서 보온병에 담아간 커피를 한잔한다고 생각해보라. 모두가 시인과 철학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논이 제법 있는 산골의 둘레길의 동네 건너편 산자락에 사람이 전혀 올 것 같지 않은 민박집이 있다. 들밥도 해주고 동네 아저씨들이 막걸리도 먹는 모양이다. 나도 한 번 절밥 때를 놓쳐서 그 집에 가서 요기를 청했더니 우거지 국밥을 해줬다. 토속적인 맛이다. 장사도 안 되는데 왜 이런 데 민박집을 차렸냐고 했더니 소일거리란다. 장사도 꽤 된다고 한다.

이 집은 막걸리를 먹어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청주에서 일당이 위로 방문한다고 해서 술 안 먹는 분 모시고 오라고 했다. 요새는 술 안 먹는 분이 술 먹는 놈 서넛을 감당한다. 술 안 먹는 분을 모시고 일당이 왔다. 간단하게 주문했는데 깔리는 밑반찬이 장난이 아니다. 텃밭에서 재배한 각종 무공해 쌈이 커다란 소쿠리로 들어온다. 옻순, 두릅 장아찌에 묵은지가 포기째로 나오고, 물김치, 갓김치, 알타리에 더덕, 귀한 거라고 먹어보라면서 오디를 주는데 좀 달달한 게 꿀에 잰 거 같다. 주문한 안주는 반 넘어 남았고 밑반찬만 몇 번 리필해서 다 먹었다. 막걸리를 몇 병 먹었는지 세질 않았다.

요새는 많이 걷지 않는다. 한 번에 시간 반 정도씩 수시로 앉아 있으니까 나돌아다닐 시간이 없다. 요새는 절 반경 1킬로 밖을 안 나간다. 간단한 산책, 몸풀이 요가, 앉아 있기를 한 사이클로 하여 서너 차례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잘 때가 된다.

그래도 소소한 재미는 있다. 요즘처럼 더울 때는 점심 먹고 나면 뭐든 하기가 쉽지 않다. 배낭에 캠핑용 접이식 의자를 챙겨 넣는다. 공양간에서 조달한 복숭아, 토마토를 비닐에 담는다. 방에서 3분 가면 뒷산 마른 계곡이 있는데 평상시에는 물이 쫄쫄쫄 흘러서 볼품이 없다. 그런데 비가 오면 물이 콸콸콸 흘러넘친다. 비 오는 날 가면 안 되고 비 오고 나서 이삼일 간은 효용가치가 있다. 짐 챙겨 올라가면 계곡 한가운데 나를 위해서 준비해놓은 것처럼 2~3인용 상 모양의 편편한 바위 위로 발목 찰 정도로 물이 흐른다. 바위 앞에는 조그만 폭포에서 물이 떨어진다. 야외용 접이식 의자를 바위 위에 설치하고 과일을 봉지에 넣어 접이식 의자에 매달아 물속에 담가 놓는다. 아무도 모르는 내 공간에서의 휴식이다.

하늘을 보면 우거진 숲 틈으로 햇살이 여기저기를 뚫고 들어와 선경을 연출한다. 가만히 물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담가놓은 과일을 꺼내 한입 베어 물면 그 맛을 어찌 말로 형용하겠는가.

신선놀음이라고? 머리에 떠도는 상념만 없으면 그 말이 딱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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