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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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3.07.1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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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유튜브에서 고양이나 개가 몇 마디 짧은 문장을 녹음한 버튼을 누르며 주인과 소통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밥 줘', `놀아 줘', `산책하자', `사랑해' 따위의 인간의 말을 익힌 반려동물을 볼 때 경이롭다. 왜 인간은 우주밖에 생명을 만나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써버리는가. 이미 지구에 와 있는 외계 생명체가 있는데!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가수 요조는 두 마리 고양이와 사는데 평소에 그 둘을 `형' 또는 `털인간'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양이나 개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란다. 친한 지인은 키우던 고양이가 죽은 1주년을 기념하여 해줄 수 있는 것은 없고 좋아하는 담배를 끊기로 했다는 말에 함께 살았던 반려동물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실제로 지인은 담배를 끊었다.

얼마 전 박정섭 작가가 쓰고 그린 `검은 강아지' 작품은 사랑받는 존재였으나 버려지고서야 자신을 마주한 가련한 우리의 모습으로 투사되었다. 선명했던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는 검은 강아지의 독백은 희망찬 날의 기억이 아니다. 헛헛한 희망을 주고 떠난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미련이며 자기합리화다. 착한 반려견은 기다리고 있어야만 버림받은 현실을 피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허망한 그리움만 안고 살다 스스로 죽음의 골짜기로 자신을 몰고 간 어느 작은 생명의 이야기는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의미다. 특별히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동물과 산다는 것은 그의 필요를 채우는 당연한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하는 암묵적인 동의와 합의가 있다. 그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됨에 따라 서로를 보살피게 된다. 이렇게 관계는 형성되고 고착되고 낯익어진다. 하지만 어느 날, 일방적인 버려짐으로 모든 관계가 끝나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동물에 한정된 상황만은 아니다. 우리도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로부터 단절되고 버려질 수 있다. 그때 남는 것은 오롯한 나다. 나의 나 됨은 혼자 남겨졌을 때 드러난다. 그런 시간에 나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주는 작품이다.

버려진 강아지는 곧 데리러 온다는 주인의 말에 시간이 사라진 것처럼 기다린다. 요즘 유행하는 희망고문 같은 것이다. 어느 날 주인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강아지 앞에 뜻밖에 예전의 자신처럼 뽀얀 강아지가 나타난다. 잠시 지루한 기다림을 잊고 마주 앉은 새로운 친구와 즐겁다. 우리 주인은 착하니까 너도 함께 데려가 줄 거라는 공수표도 막 내민다.

하지만 당신은 눈치챘을 것이다. 강아지는 거기 그 자리에서 눈에 덮인 채 죽고 만다. 잠시 즐거웠던 강아지의 환형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데려갔을까, 착하게 기다리면 올지도 모른다는 강아지의 맹목적 믿음. 그 허망한 희망고문과 의존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고 자신의 나중을 주인에게만 맡긴 대가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주인의 매정함 속에 죽음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혼자 남겨질 때를 대비하라는 재난 메뉴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생은 이처럼 머나먼 쓸쓸함을 안고 살아가는 시간도 있다는 것이다. 버림받은 느낌이 넘실거리는 어스름 저녁, 쓸쓸하고 머나먼 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노을처럼 마음에 번질 때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훔치고 싶다. 그래서 내 것이 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아프고 절망스러운 순간에 자신을 버리지 않기를, 혼자남은 날에도 늠름하게 숟가락을 들고 삶의 엄중함을 따라 힘을 내기를. 그리하여 힘이 생겼다면 길에 버려진 작은 생명에 넓은 어깨가 되어 기댈 언덕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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