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직내(敬以直內)
경이직내(敬以直內)
  •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23.07.13 17: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론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방석영 무심고전인문학회장

 

지구 온난화가 어느 정도 진행됐음을 누구나 실감할 만큼 후덥지근한 날씨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이다.

서늘한 가을날의 독서가 그리워 작정하고 새벽 일찍 일어나 책장에 꽂혀있는 주역 책을 뽑아 들고 여기저기 뒤적거렸다.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 즉,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엔 경사가 쌓인다는 가르침으로 유명한 주역 문언전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도 특히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라는 구절이 눈에 쏙 들어왔다.

경이직내는 명덕, 도, 불성, 성령 등으로도 불리는 인간 내면의 신령스럽고 순수한 참 성품을 공경하고 따름으로써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中)의 마음을 회복, 자신의 내면을 바르고 올곧게 한다는 의미다.

의이방외는 경이직내를 통해 회복된 지공무사한 중(中)의 마음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함으로써 세상을 반듯하게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불교적 표현을 빌린다면 경이직내는 위 없는 깨달음인 보리를 구하는 상구보리에 해당하며 의이방외는 깨닫고 나서 중생을 교화하는 하화중생과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활쏘기에 비유한다면 마음과 호흡을 고요하게 가라앉혀 0점 조정하는 것이 경이직내고 과녁을 향해 정확하게 화살을 겨눈 뒤 활시위를 당겨 목표물에 적중하는 것이 의이방외라고 할 수 있다.

불성, 도, 성령 등으로 표현되는 내면의 순수 의식을 공경하고 따른다는 것은 사서 중 하나인 대학이 강조하는 밝은 덕을 밝히는 명명덕, 중용이 말하는 희로애락이 일어나기 이전의 중(中)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극기복례(克己禮) 등과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맹자님께서 말씀하신 이리저리 날뛰는 생각을 붙잡는 구기방심(求其放心) 즉, 들뜨고, 흐트러지고, 탁해지고, 어두워진 마음을 가라앉히고, 모으고, 맑히고, 밝히는 것과도 같은 맥락의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맹자님은 존기심(存其心) 양기성(養其性) 소이사천야(所以事天也) 즉, `그 마음의 보존하여 성품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경(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동서고금의 모든 종교 및 수행의 근간이 되는 마음의 0점 조정이 바로 주역 문언전이 강조하는 경이직내(敬以直內)의 요체다.

주자는 경(敬)과 의(義)중에서도 경에 초점을 맞추며, 정제엄숙(整齊嚴肅), 주일무적(主一無 適), 상성성(常惺惺), 기심수렴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이라는 가르침을 전했다. 정제엄숙(整齊嚴肅)은 겉으로 드러나는 몸가짐을 흩어짐 없이 단정히 하는 것이고 주일무적(主一無適)은 고요하고 갈등 없는 일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상성성(常惺惺)은 마음이 고요하면서도 별처럼 또렷또렷하고 초롱초롱하게 깨어있는 것을 말하고 기심수렴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은 바깥 대상으로 내달리는 마음을 거두어들여 무심함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이직내를 통해 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는 중(中)의 마음을 회복했다면 어찌 지공무사한 마음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을 발현(發顯)하며 다 함께 살기 좋은 대동 사회 구현에 앞장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났다면 어찌 이웃을 제 몸처럼 보살피지 않겠는가? 나 없음의 무아를 깨닫고 대자대비의 보살이 되었다면 어찌 중생의 아픔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