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
그 아이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6.29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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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자동차회사의 하청업체에서 4~50대를 보냈다. 쇳덩어리를 만지고 조립해야 하는 꽤 고단한 일이었지만 고맙고 예쁜 동료들이 있어서 웃을 일도 많은 날이었다. 갓 뽑아온 커피를 먼저 마시라며 내밀던 은수, 초코파이에 매직펜을 꽂아 불을 붙이고 생일파티를 해주었던 근호, 집안 얘기며 여자 친구 얘기를 조근조근 잘도 하던 영우, 순수하고 명랑한 그 아이들이 있어서 난방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추운 공장에서도 따뜻한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아이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아이가 한 명 있다. 성구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 누가 묻기 전에는 먼저 말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무거운 짐이나 랙을 옮기는 일이 있을 때는 말없이 도와주었고, 통근버스가 운행되지 않을 때는 같은 방향인 우리를 집까지 태워주었다.

그 아이가 회사를 그만두고 떠난 뒤 그 애가 없는 빈자리는 한동안 표가 났다. 뒷주머니에 도끼 빗을 꽂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손 하트를 날리는 민재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민재의 손 하트에 휘둘려 성구를 잊어가던 어느 날 근호가 전단지 한 장을 들고 왔다. 성추행범을 찾는다는 현상수배 전단지였다.

“성구하고 너무 닮아서 살짝 떼어 왔어요. 야구모자 밑으로 보이는 코랑 입이 성구랑 똑같지 않아요?”

근호의 설명에 우리는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사진이 흐리기도 했지만 성구가 현상수배자가 되어 붙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성구 아니야. 성구가 그럴 리가 없지.”

“이모! 이 입술 좀 봐. 성구 맞다니까. 성구랑 술 마시고 헤어지면 성구는 집으로 안 가고 항상 다른 데로 갔었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네.”

“성구가 알면 서운하겠네. 생사람 잡지 말고 얼른 가서 일이나 해.”

그렇게 근호를 야단쳐 보내고 전단지 사건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반장이 조회시간에 성구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했다. 전단지의 주인이 성구가 맞고, 벌써 체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피해를 본 사람은 없는지 확인까지 하고야 반장은 침통한 얼굴로 조회를 마쳤다. 우리가 아는 착한 성구가 입에도 담기 사나운 성추행범이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그야말로 단체로 맨붕에 빠졌다. 그동안 성구는 어떤 눈으로 우리를 보아왔을까? 하는 생각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한동안 아이 돌보미 일을 했던 나는 정기적으로 영유아기 아이들의 신체나 정서적 발달에 대한 교육을 들었다. 영유아기적의 정서적 신체적 학대는 아이들을 정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난 괴물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모나 보호자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 그래서 애착 형성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정서적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것은 공식과도 같은 절차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올바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어른들의 학대가 우리의 아이들을 동정조차 받을 수 없는 흉악범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젠 모든 것이 그리움이 된 그때, 추억 속에서조차 그리움이 되지 못하고 금 간 유리처럼 마음을 에는 그 아이 성구. 다시는 같은 범행을 저지르지 않기를, 어둡고 흉흉한 인생이 조금은 나아지기를,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성구와 같은 아이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전지전능한 신께 간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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