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꽃집에 대한 오해
장미 꽃집에 대한 오해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3.06.2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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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지금이야 그 집이 그런 집인 줄 알았지만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다. 30년 전쯤이었을까? 정말 향기 나는 꽃들이 만발한 꽃집인 줄 알았다. 그러니 그 집 앞을 무던히도 잘 지나 다녔을 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서울을 가기 위해 터미널을 가던 길이었다. 장미 꽃집은 터미널 뒷골목에 있어, 역말에서 가게 되면 그 집 앞을 지나야 했다. 대개 문이 닫혀 있었는데 그날은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잰걸음으로 걷다 무심결에 가게 안을 보게 되었다. 아, 화려한 꽃상여 하나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수굿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꽃상여를 이리 가까이 보다니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어귀에는 상여움막이 있었다. 동네 사람이 죽으면 공동으로 사용하던 상여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동네를 들어오거나 나갈 때면 꼭 지나야하는 길목에 있어 동네 꼬마들은 그곳을 지날 때면 눈을 질끈 감고 걸음을 빨리하거나 뛰곤 했다. 그곳으로 눈길을 돌리기라도 하면 귀신을 볼까 무서워 그랬을 것이다. 더구나 꽃상여는 멀찍이서 들려오는 요령 소리만으로도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느 해인가.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부모님께 듣게 되었다. 며칠 후 나는 꽃상여가 우리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는 소리에 아침 내내 두려움에 떨었다. 최씨 아저씨가 요령을 흔들며 부르는 선창에 맞추어 상여꾼들은 구슬픈 만가를 부르며 우리 집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 디여~”

나는 어서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상여꾼들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죽음이라는 말이 어린 시절에는 왜 그리 무서웠을까. 그 뒤로도 가끔 꽃상여는 마을 아저씨들이 불러주는 만가를 함께 싣고 큰골이나 웃골을 향해 올라가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도 무섭고 두려웠던 상여가 앞에 있다니… 그런데 어느덧 나도 아이를 낳고 세월의 풍파도 겪어서 일까. 예전의 꽃상여가 아니었다. 상여에 핀 종이꽃들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장미 꽃집 주인 부부의 손끝으로 빚어 낸 작품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우두망찰 서 있다 터미널로 향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어 그 집을 정식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집은 누군가 죽음을 맞아야 찾게 되는 집이었다. 물론 그때도 잔디도 팔긴 했지만 대개는 꽃상여를 더 많이 팔았다. 근방에서는 꽃상여집이 그 집 밖에 없어 그 집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편과 들른 그날도 누군가를 싣고 떠날 만반의 준비가 된 꽃상여가 가게 안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밤새 만들어 놓은 색색의 화려한 종이꽃들이 가게 구석에 쌓여있었다. 주인 부부의 안색도 피곤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우리를 보고는 살갑게 대해 주셨다. 인정이 넘치는 분들이었다. 사실 그날 묻고 싶었다. 가게 이름을 `장미 꽃집'으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은 `장미꽃집'도 미리 약국 삼거리의 대로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제 그 집에서는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장례식장과 화장터와 납골당이 더 이상 꽃상여를 필요치 않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세월은 모든 것들을 바꿔 놓았다. 시나브로, 꽃상여는 먼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잔디만을 취급하는 `장미꽃집'은 그래도 여전히 음성 사람들에게는 `꽃집'이다. 고단했던 이생의 삶을 배웅해 주던 꽃상여였다. 그 뒤를 온 동네 사람들이 따르며 슬퍼하고 배웅했던 그 시절, 죽은 이를 위로해 주고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준 것은 꽃상여였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니 그 집은 꽃집이 맞다. 사람향이 고운 `장미꽃집'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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