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어 내가 있네
네가 있어 내가 있네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06.22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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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다른 길이 없다. 오로지 한 사람을 믿고 가야 한다. 주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놀라 울고 웃는다. 그의 말은 신의 말씀이자 명령이다. 잘 지켜야 하고 따라야 하는 법이 된다.

그이가 아프면서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이 한다. 잦은 검사와 진료를 받느라 기다리는 시간에 지친다. 두 번의 시술과 세 번의 방사선 치료를 끝으로 긴 여정이 끝났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바로 결과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6개월을 지켜보아야 한다. 지옥을 오간 치료 받는 과정보다 앞으로 기다리는 시간은 더 지옥이 될 듯싶다.

그이를 담당하는 주치의는 소화기내과 김교수님이시다. 이 분은 병을 잘 파악하여 사람에 따라 그 상태에 맞게 적절한 치료법을 지시한다. 그러면 영상의학과에서 시술을 담당하고 방사선종양학과에서 방사선치료를 시행한다. 단독으로 모든 치료를 하는 게 아니라 협진을 하는 것이다.

명의(名醫)도 혼자서는 될 수가 없다. 자기만 훌륭하여 얻은 명성이 아니다. 영상의학과. 방사선종양학과가 뒤에서 받쳐주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전쟁에서 지휘관의 한마디는 전쟁의 승. 패가 달려있다. 까딱 잘못 내린 판단은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닫는다. 명의(名醫) 또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예리한 판단력이 치료에 있어 성 패를 가른다. 한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는 셈이다.

그이는 건강의 중요성을 알고부터 산에 자주 간다. 같이 운동하러 가자면 질색을 했건만 이제 변했다. 제주의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족은녹고뫼 오름을 좋아한다. 산이 매혹적이다. 그 길을 돌아가면 조릿대 길이 나타난다. 살짝 숨을 헐떡이는 오르막을 오르면 환상의 꽃길이 펼쳐진다. 감탄사가 이어진다. 사진으로도 다 담아지지 않는 이 길을 걷노라면 황홀경에 들어선다.

어찌나 예쁜지 둘은 홀딱 반했다. 산수국 꽃밭이다. 지금 막 꽃이 피기 시작했다. 꽃구경 때문인지 사람들이 더 많이 늘었다. 꽃이 그이를 바꾸어 놓았을까.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 매일 인사를 한다. 교차하느라 물러난 그의 뒤에서 나도 따라 인사한다. 한 번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인사를 되돌려준다. 거기에 가끔 “좋은 산행 되세요” 하는 덤도 돌아온다. 그뿐이랴. 돌아서 다시 만나는 사람들은 “또 보네요”하고 먼저 아는 척을 한다.

산에서 인사를 시작한 이후로 그이가 밝다. 아픈 뒤로 마당발이던 사람이 제시간에 집에 꼬박꼬박 들어오고 약속을 줄였다. 상실감에 사람 만나는 일도 피했다. 호탕한 성격이 점점 더 소심해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속이 상했다. 산에서는 전에 모습을 되찾는 것 같아서 좋다.

병원을 오가면서 선명하게 알았다.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아무리 훌륭하고 잘난 사람이라도 누군가와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유명해지고 빛나는 일은 절대 없음을.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조연(助演)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임을 알았다. 요즘 “우분투”를 실감하고 있다. 이 말은 아프리카 반투족의 말로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이다.

그이는 엎드린 자신을 일깨워 세우고 있다. 밝아지려고 산에서 먼저 인사를 시작했고 성공적이다. 건네어간 인사가 더 밝은 말이 되어 돌아온다. 힘든 마음을 산에서 치유 받고 있다. 거기 사람으로 하여 위로가 되어 상처가 아물고 있다. 먼 곳에서, 가까이에서 나를 둘러싼 이들이 있어 빛나는 내가 있음을 산길에서 또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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