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복숭아를 좋아한다. 뽀얗고 노랗고 분홍 빛나는 색감이 눈부시도록 곱지 않은가? 얇은 껍질을 벗기고 한 입 깨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과즙과 향기는 또 얼마나 좋은지. 그뿐인가? 학생 때 읽은 이상화 시인의 <침실로> 속 농염한 수밀도는 과육을 씹을 때마다 떠올라 상상의 날개를 편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가 오랜만에 혼자 친정에 간 적이 있었다. 복숭아가 제철이라고 한 바구니 앞에 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고 있을 때였다.
“김 서방이랑 같이 오지 않고?” 친정어머니의 물음에
“미운 사람 뭐하러 같이 와요?”
나 혼자 좋아서 우기고 우겨서 한 결혼이면서 왜 그때 더 좀 뜯어말리지 않았냐며 원망스럽다면서 깨물어 먹고 있는 복숭아마저 왜 이렇게 맛이 없느냐며 생떼를 부렸던 기억이 난다.
“겉만 보고 사 먹는 것, 속을 알 수 있어야지.”
어머니는 “복숭아 하나도 무르지 못하는 것, 하물며 사람 세상은 어쩌겠냐?” 하셨다.
“인연이고 팔자 속이다. 운명이거니 여기며 잘 살아야 헌다.”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은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오랜만에 손자 준호가 왔다. 어미가 직장에 다녀야 해서 아기 때부터 초등학교까지 외가에서 보낸 터라 할미인 나와는 아무래도 각별하긴 했다. 어릴 땐 어미보다 할미를 더 좋아한다고 해서 어미가 서운해하던 기억도 새롭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 하면서 달려와 덥석 안기면 나는 `우리 강아지, 내 강아지'를 연발하며 두 팔을 한껏 벌려 껴안을 때의 벅찬 기쁨은 지금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예전 내 아이들 기를 때와 비교할 바 없던 사랑스러움, 세상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손자 준호로 여겨졌는데 요즘은 다 컸다는 듯 데면데면 그전과는 다르다. 할미와 손자, 어릴 때는 상호교감이었다면 요즘에 와서는 순전히 할미의 외사랑이다.
“난 너만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고 고백하듯 말하면 눈 한번 찡긋하고 고개를 돌리며 빙긋 웃고 만다. 그런 준호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도 하고 오랜만에 할미를 보러 왔다.
“여자 친구 있니?”
“…네.”
“어떤데? 이쁘고 착해야 하는데?”
우물우물 복숭아를 먹다 말고 멋쩍은 듯 `히잉' 웃더니 딴전 피우듯
“복숭아 맛이 달라요,”한다.
“우리 준호 준다고 맛있게 생긴 것으로 고르고 골랐는데,”
“그러게요. 맛있게 보이는데…. 겉과 속이 다르네요.”
“여자도 그렇거든, 조심해야 혀,”
전부터 염려하고 바랬던 말이 툭, 튀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