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과 의리의 의병장 습재 이소응
충성과 의리의 의병장 습재 이소응
  • 김명철 제천교육장
  • 승인 2023.06.1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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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제천교육장
김명철 제천교육장

 

이소응(李昭應, 1861~1928)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화서학파의 일원으로 유중교 선생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밝아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구한말 춘천의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스승 유중교가 제천으로 이주하자 스승을 따라갔는데 스승이 돌아가시자 함께 공부하던 유인석을 스승으로 모셨고, 유인석의 문집을 제자들과 함께 편찬하여 한 말 의병 역사를 정리하고 후대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에 유중락, 이만응 등을 중심으로 한 1000여명의 유생들과 백성이 춘천부에 모여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소응은 다음과 같은 격문을 지어 팔도에 보냈다.

“지금 왜노가 창궐하고, 국내외 적신이 그들에게 아첨하여 국모를 시역하고 군부를 늑삭하기까지 하며, 만백성을 몰아서 개나 양의 무리 속에 빠뜨리고, 요순과 공자·주자의 도를 쓸어 없이하려 하니 황천상제는 위에서 진노하시고, 온 군대와 백성이 모두 불공대천의 원수로 생각한다. (중략) 이것은 모두 이적금수의 앞잡이요, 난신적자의 도당이니, 단연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

이소응은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의 머리를 강제로 깎은 무리를 불공대천의 원수로 규정하고 그들에 대한 복수를 큰 의리로 내세워서 의병투쟁의 명분을 세웠다. 그러나 춘천의 의병 세력은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관군과 접전 끝에 패하였다. 이에 병기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이소응은 춘천의진을 종형인 이진응에게 맡기고 자신은 지평감역 맹영재에게 원병을 요청하러 갔다가 도움은커녕 붙잡혀 감금당하는 일을 겪게 된다. 유인석의 부하 정익과 이찬익의 도움으로 겨우 풀려난 이소응은 1896년 2월 17일 제천의 유인석 의진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 후 제천 유인석의 의병들과 서북으로 향하다가 원주 치악산에서 은거하였다.

47세 되던 1898년에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던 유인석의 편지를 받고 요동 통화현 오도구로 들어가서 유인석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의화단 사건이 벌어지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상실하고 모두 귀국을 하여 제천에서 생활하였다.

이소응은 59세가 되던 1910년에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청풍 감옥 구금 때 일제 경찰이 “우리들은 다만 거의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요.”라고 하자 이소응은 “내가 지금 쇠하고 병들어서 의병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힘이 없어 어찌하지 못하는 현세를 한탄할 뿐이다.”라며 일경을 꾸짖고 뜻을 굽히지 않자, 10여 일 만에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1911년 가족과 함께 요동으로 건너가 유인석과 함께 활동을 했다. 1915년에 유인석이 사망하자 유고를 모아 편찬하고 76세 고령에도 스승 유중교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1930년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79세의 나이로 요동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의병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의병항쟁을 단순한 위정척사의 성리학적질서 고수가 아니라 당시의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 세력을 물리치려는 시대정신과 시민의식의 발동으로 재해석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의병운동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광복할 수 있었고 나아가 근대화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바탕이 되는 현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21세기 시대정신과 시민의식을 교육하는 기본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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