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후 세계
현대 이후 세계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3.06.18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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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곧 절대(絶對)란 없다. 
서양 근대인(modern)들은 자아를 절대시한다. 그들은 자아가 깨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모든 걸 다 의심한다. 그런데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건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의심하고 있는 내가 있다고 한다. 이게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다. 모든 걸 의심할 수 있지만 의심하고 있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절대로 깨지지 않는 근대인의 나(我)는 이렇게 등장한다.
현대(post-modern)는 자아의 절대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절대로 깨지지 않는 자아? 절대로 깨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것의 도움 없이 스스로 존재해야 하는데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는 건 없다. 나는 타자에 의해서 세상에 있게 된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다른 사람이 없다면 내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나는 타자의 영향을 받아 변화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현대는 근대인의 절대 자아를 해체한다.
자아 해체 과정은 꽤 복잡하다. 자아 해체의 배경에 있는 타자의 배후에는 영원히 타자의 편인 절대타자(神)가 등장한다. 근대인의 자아는 궁극적으로는 절대타자를 통해서 해체된다는 정도만 알고 넘어가자.
현대 이후(post-post-modern)에서 자아의 위상은 어떨까? 현대 이후에서는 자아의 형성과정을 따지지 않는다. 곧 자아의 형성 배경에 타자가 있기 때문에 타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아가 절대적일 수 없다고 하는 현대인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자아가 있기는 하지만 자아의 형성배경에 타자가 있어서 자아가 무너진다고 하면 일단 자아는 생겨나야 한다. 곧 자아를 해체시키려면 자아가 형성되어야 한다. 먼저 만들어놔야 해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근대(modern)를 전제하지 않으면 현대(post-modern)도 없다는 말이다.
현대는 내가 타자에 의해 세상에 있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타자와 그 배후에 있는 절대 타자(神)에 의해 나의 동일성을 잃게 된다고 말한다. 탈(脫)현대인은 묻는다. 타자는 뭘까? 그건 내가 아닌 것이다. 내가 전제되지 않으면 타자도 있지 않게 된다. 자아를 해체하기 위해 근대적 자아가 형성되어야 한다. 없는 자아를 전제하고 그걸 해체하는 게 현대인이다.
현대 이후에서는 자아를 원래 없는 것으로 본다. 곧 자아를 없애기 위해 나 아닌 타자를 상정하지 않는다. 나는 뭘까? 나는 느낌과 감정, 판단의 주체이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즐거워하고, 괴로워하고, 화를 내며 시시비비를 가리며 사는데 이런 모든 작용을 주재하고 통제하는 자(agent)를 상정해서 ‘나’(self)라고 부른다. 우리는 ‘나’를 갖고, ‘나’를 통해서 산다.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맛보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이 보고, 내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가 듣고, 내가 냄새를 맡는 것이 아니라 코가 냄새를 맡는다. 냄새를 맡는 나, 보는 나, 듣는 나, 이런 건 허상이다.
자아가 허상이라면 자아를 버리기 위해 타자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 자아는 허구라서 그저 버리면 된다. 내가 보는 게 아니라 눈이 보고, 내가 듣는 게 아니라 귀가 듣는다는 걸 알게 되면 자아는 불필요해진다. 곧 자아를 상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탈현대인의 길을 따라 자아를 버리다 보면 현대인처럼 절대타자(神)에 꼭 매달릴 필요도 없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자아에 매여 있다. 자아를 상정하고 사는 게 골수에 맺혀 있는 우리네가 자아를 떨구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오죽하면 아집을 깨는 일은 다이아몬드 깨기보다 어렵다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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