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아니예요
천사가 아니예요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6.13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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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일찌감치 간호사가 되겠다고 진로를 정한 큰딸은 간호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에 취직했다. 알아서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해주니 고맙기만 한 딸이었다. 별 말없이 다녔기에 간호사라는 직업이 3D 업종이라는 말도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방사선 치료를 위해 딸의 병원에 두 달 정도 입원하는 일이 생겼다. 수간호사의 호의로 딸이 근무하는 신경외과 병동에 있을 수 있었는데 목과 코에 호스를 낀 뇌출혈 환자가 대부분인 곳이었다. 상황이야 어떻든 나는 딸과 긴 시간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것만이 좋았다.

딸이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병실을 돌며 환자의 가래를 뽑아내는 일이었다.

보호자가 없는 환자는 옷도 갈아입히고 기저귀도 갈아 주었다. 한밤중에 밖이 시끄러워서 나가보니 어느 남자 환자가 딸에게 삿대질해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전두엽에 손상을 입은 환자라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보안요원들이 와서 제지하기까지 딸은 그 환자의 포악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키운 귀한 내 딸이었다.

딸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육아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딸의 시어머니와 내가 번갈아 도왔지만 삼 교대 근무의 딸을 도와주기는 역부족이었다. 휴일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집안의 대소사나 명절에도 참석이 어려웠다. 그래서 양쪽 집안에 늘 미안해했고 죄도 없는 죄인이 되었다.

요즘은 업무량이 많아서 밥도 못 먹고 일을 할 때가 잦다고 한다. “배가 고파서 요구르트 하나 먹었어.”라고 할 때마다 백의의 천사라고 추앙받는 간호사들이 밥도 못 먹고 일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대 간호사와의 인계시간이나 처리하지 못한 업무로 인한 연장근무는 근무시간에 넣지도 않고, 교육조차도 휴일 날 불러내서 한다고 하니 이 정도면 혹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은 감기로 열이 39도까지 올랐는데도 일손이 부족해서 쉬지 못하고 해열제로 버티고 있다는 톡이 왔다.

딸이 간호대를 가겠다고 했을 때 제법 걱정이 되었다. 작은 실수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 간호사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우려는 노파심만이 아니어서 간호사의 실수가 큰 문제가 되어 병원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종종 있다고 한다. 고열이 나는 상태로, 밥 먹을 새도 없이 정신없이 일을 하는데 실수가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동안 정치권을 뜨겁게 했던 간호법은 폐기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을 세세히 모르니 가타부타 의견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이 시점에서 간호사들이 더 이상 혹사당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치는 취하고 넘어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간호사를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면서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진짜 천사이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현장에서, 밥도 못 먹고 일하면서도 천사처럼 웃으며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단지 우리의 딸이고 누이이고 SNS를 즐기는 그저 평범한 이웃인데 말이다.

내일은 내 생일이다. 큰딸이 다행히 쉬는 날이라며 미역국 끓여서 올 테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딱 기다리란다. 이럴 때 보면 진짜 천사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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