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의 실종
`연두'의 실종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30 1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오늘 5월이 끝난다. 이 5월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밀레니엄타운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유채꽃밭에서 가는 봄이 유난히 서럽다.

해를 거듭할수록 봄이 짧아지고 있다. 갇혀 지내던 감염병의 굴레에서 벗어나 모처럼 꽃향기를 만끽하려 했지만 올봄 무심천 벚꽃은 유난히 서둘러 꽃잎을 버렸다.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거기까지만'- <정희성. 연두>

가는 봄이 아쉬운 건 절정으로 만개한 봄꽃들의 정취에 마음껏 취하지 못한 마음의 모자람 때문만은 아니다. 가만히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를 부드럽게 하는 세상의 모든 여린 빛깔들이 서둘러 빛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봄이 열리는 일은, 우리가 봄을 느끼는 일은 아주 가냘픈 색깔에서 시작된다. 겨우내 굳게 열리고 닫혀있던 흙의 완강함을 이겨내면서 새싹을 키우는 일은 초록이 아닌 `연두'가 한다.

대지에 가깝게 몸을 구부리는 정성을 기울여야 살필 수 있는 풀 한 포기의 여린 빛이 큰 나무에까지 번지는 봄날. 그런 온 천하의 신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빛이다.

`연두'가 실종되고 있다. 5월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마침내 들판과 먼 산을 바라보다가 `연두'가 얼마나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났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서럽고 짧은 청춘이, 지독한 어른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연두'로 머무는 모든 생명의 시간은 조용하고 치밀하게 성숙하는 계절이다. 그런 `연두'는 자본의 탐욕을 채우기에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어른이 된 인간은 `연두'를 서둘러 지우도록 안간힘을 쓴다.

폭발적으로 사용하는 화석연료와 시간을 줄이기 위해 죽음의 질주를 마다하지 않는 경쟁, 그리고 자연을 파괴하고 지배하려는 만행과 계절을 마구 넘나들며 섭리를 무너뜨리는 경작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이제 `연두'의 시간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곳곳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실종되고 있고, 소아과는 사라지고 있다. 농촌지역 공립 유치원의 문을 닫는 정책의 결정에 주저하는 일이 조금도 없다. 서둘러 사라지게 한 모든 성급함과 허술함은 결국 다시는 되돌릴 수 없으며, 그러므로 `소멸'을 걱정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헛말이다. 저항하기 힘든 부드럽고 여린 것들을 서둘러 없앤 자리는 고스란히 열악한 곳이 될 것이며 그 열악함마저 `소멸'로 이어지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세상의 모든 생명과 질서는 다 때가 있다. 겨울에는 움츠리거나 땅속에서 조용히 기다리며 봄을 기다리는 것은 생명을,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봄에 싹을 틔우고 `연두'로 버티는 시간 또한 모진 여름의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건강함을 위한 보이지 않는 역동의 순간들이다.

그러므로 때를 벗어나 언제든 어디에서든 섭취할 수 있고 소비할 수 있으며, 일제히 생각이 같아지고 한꺼번에 무관심해지는 인간의 욕망은 실종된 `연두' 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조동하. 나 하나 꽃 피어> 초록이 짙어지기 전에 노랗게 피어 제 할 일을 하던 유채꽃이 6월의 밀레니엄타운에 만발하고, 새로 지을 청주시청 청사 앞 빈 땅에는 가을꽃인 메밀이 한창이라고 자랑이다.

세상에 철모르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것인지, 철없는 지도자의 때를 못 맞추는 `아름다움'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우매함을 탓해야 하는지. 연두가 사라진 5월은 그렇게 끝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