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리의 봄
중리의 봄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3.05.3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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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봉래산은 친정집과 마주한 산이다. 그 산은 어린 시절 나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일터이기도 했다. 어느 집 하나 불을 때지 않은 집이 없었던 그때, 우리는 친구들과 그곳에서 불쏘시개였던 관솔을 따거나 솔방울을 줍기도 하고 잔솔가지를 비료 푸대에 가득 채워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봉래산은 우리 마을의 뒷산으로 야산이었다. 산 초입에는 구릉으로 되어있어 친구들과 소꿉놀이도 하고 누렁이 암소를 근처에 매어 놓고 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내 고향은 신천2리다. 신천2리는 큰말, 중리, 주주골의 세 마을로 이루어졌다. 근방에서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학생들도 많아 아침이면 마을회관 앞에서 6학년 언니 오빠의 뒤를 따라 열을 지어 학교를 갔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새마을 운동이 한참 일어났던 시기여서 학교도 향우회라는 이름으로 마을마다 6학년을 단장으로 만들어 놓고 아이들을 인솔하도록 했다. 세 마을 중 우리집은 중리에 있었다. 신천1리인 냇말과 신천3리의 참샘이 중간에 있다 하여 중리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우리 마을은 대부분 인사 밭을 경작하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작은 땅을 도지로 부치면서 인삼농사를 지었다. 우리 집과 붙은 밭이었는데 십년도 훌쩍 넘은 어느 날 작은 오빠가 도회지에서 번 돈으로 그 땅이 나중에는 우리 밭이 되었다. 여하튼 내가 초등학교 때 우리 마을은 초겨울이면 삼밭에 얹을 이엉을 엮느라 어린아이의 손도 빌려야 할 만큼 바빴다. 우리 사남매는 옆집 용석이네 삼밭에 얹을 이엉을 엮어 돈을 벌곤 했다. 용석이네는 동네에서는 부유한 집이었다. 삼밭도 우리 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크기도 했고, 밭도 여러 군데에 있었다. 부모님이 남의 집으로 일을 하러 가시면 우리 사남매는 우리 집과 이웃한 용석이네 집 앞에서 둘씩 짝을 지어 어둑해지도록 이엉을 엮었다. 동네에서도 우리 사남매는 억척이로 소문이 자자했다. 허구헌날 보리밥에 나물죽이 고작이었지만 투정을 하거나 비뚤게 자라지도 않았다. 초등학교만을 나오고 공장을 다니던 언니는 남의 집 일로 고단한 어머니를 대신해 살림을 도맡아 했고, 큰오빠와 작은 오빠는 학교가 파하면 소꼴을 베어 외양간에 넣어주고 누렁이 소도 돌보았다. 삼밭에 난 풀을 뽑는 일도 언니와 오빠들의 몫이었다. 막내였던 나는 친구들과 봉래산에 올라가 노는 것을 즐겼는데 산에서 내려올 때는 비료 푸대에 불쏘시개라도 담아올 만 큼 빈손인 때는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속정은 있으셨지만 다정다감하신 분은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자식에게 대놓고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지도 않으셨다. 그럼에도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있다. 어느 해 이른 봄, 산에서 내려오는 아버지의 지겟단에는 진달래가 한 거듬이 꽂혀 있었다. 딸을 위한 아버지의 선물인 셈이었다. 아버지의 지겟 단에는 진달래 외에도 여름이면 개암나무 열매가 실하게 달린 가지도 묵직하게 얹어오곤 하셨다. 그 고소한 맛이라니, 그 맛을 지금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는 중리의 모습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초천리 밤나무재로 넘어가는 산인 웃골에 몇 년 전 큰 길이 나며 동네가 갈라져 버렸다. 웃골은 그 옛날 우리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셨던 논과 밭이 있던 곳이다. 얼마 전 우연히 지인과 친정 마을인 중리로 냉이를 캐러 간 일이 있었다. 이제는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아서일까. 참 낯설었다. 어릴 때 뛰놀던 곳이건만 그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드문드문 만나는 사람들도 처음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월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사람도 자연도 말이다. 정겹던 봉래산도 개발로 그 옛날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냉이를 캐고 나오던 길에 돌아 본 내 고향 중리, 봉래산의 진달래도 웃골의 그 차갑던 계곡도 이제는 아스라이 먼 기억이라 생각하니 세월의 무상함에 씁쓸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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