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하나 사이
벽 하나 사이
  • 박윤미 수필가
  • 승인 2023.05.3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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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박윤미 수필가
박윤미 수필가

 

`안녕하세요? 아래층입니다. 지금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 절구질을 하시는지 뭐 하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저희가 매일 너무 괴롭습니다. 아파트니까 당연히 층간소음이 있는 거고 가끔 있는 일은 참고 살아야겠지요? 그런데 너무 늦은 시간까지 쿵쾅거리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린답니다. 어젯밤에는 자다가 너무 소리가 커서 두 번이나 깼는데, 두 번째 깼을 때 시간을 보니 4시였어요.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랍니다. 매일 내일은 나아질 거라는 생각으로 참아보는데 매일 계속 반복된답니다. 혹시 아래층에 그렇게 크게 소리가 들려서 힘들어한다는 것을 모르실까 봐 알려드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글을 씁니다. 제가 알아야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실제 편지 전문(全文)이다. 절구질 같은 소리가 잠깐이었으면 그냥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또 참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끝났구나 싶어 마음을 달랠 참이면 잠시 후 또 시작되고, 그렇게 세 번째 반복되었을 때 나는 끓는점을 넘긴 주전자처럼 분기충천해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신발을 신다가 발길을 돌려 편지지를 꺼내왔다. 너무 고운 거 말고 중성적인 느낌의 것을 골랐다. 어찌나 술술 쏟아져 나오던지, 얼마나 후련하던지, 거침없이 일필휘지했다. 윗집 문 앞에서 노크를 할까 말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아래로 내려가 우편함에 편지를 넣기로 했다.

아파트 생활에서 층간 소음 문제가 종종 발생한다. 이런저런 심각한 사연도 많이 들었는데, 그동안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두 딸이 어렸을 때였다. 엘리베이터에서 아래층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아이들을 보고는 `너희들, 어젯밤에 뭐 하고 놀았니?' 하며 웃으시는 거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했다. 지난밤 인라인스케이트를 처음 신어본 아이들이 헬멧과 무릎과 손목 보호대까지 안전 장구도 다 장착해 보고, 섰다가 넘어지고,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걸어보며 우리 집은 웃음이 넘쳤었다. 그때서야 그동안 벽을 통해 전달되었을 만한 우리의 이기적인 생활을 되짚어 보는 것이었다.

어느 여름 우리 집에서 사촌 동생들이 모두 모인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겠다, 술이 여러 잔 들어갔겠다, 아파트니까 좀 조용히 하라고 해도 잠시뿐이고 흥이 점점 과해져서 결국 경비원까지 다녀갔다. 그러나 조금 조심하는가 싶더니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아마 꽤 늦은 시간까지 계속 시끄러웠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모두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잠결에 누구시냐며 문을 열었는데 위층에서 왔다고 한다. 나는 어제 너무 죄송했다고 사과부터 했다. 그런데 그가 온 이유는 사과받으려는 게 아니라 사과하기 위함이었다. 푸른 아오리 사과 한 상자를 주며 이사 간다고 인사하러 온 것이었다.

다음 날 외출할 때 보니 내 우편함에 답장이 와있었다. 그림이 그려진 파란 카드에는 거듭 전하는 미안한 마음과 슬리퍼도 꼭 신겠다는 약속이 담겨있었다. 역시나 윗집에서는 아랫집에 어떤 소리가 전달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소리는 종종 들린다. 다만 발소리가 조금 작아졌고, 자정 넘어서도 깨어있던 젊은 부부의 생활패턴엔 상당한 변화가 있다. 다만 강아지 두 마리가 낮이건 밤이건 불시에 흥분하여 짖고 뛰는 것만은 주인도 어쩔 수 없으리라 짐작이 간다.

생활 모습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잖은가? 사람 사이가 겨우 벽 하나 사이인데 그 벽이 참 얇기도 하고 두껍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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