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하게 지켜봐 주는 감나무
묵묵하게 지켜봐 주는 감나무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 승인 2023.05.2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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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공예진흥팀장

 

새벽 나절, 길바닥에 마카로니 과자가 잔뜩 떨어져 있다. 손주에게 먹이려 샀던 주전부리를 흘렸나? 보행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내 달리는 차를 피하다 나뭇가지에 걸려 비닐봉지가 찢기며 새어 나온 건가? 조만간 주차할 차의 바퀴에 바스러질까 서둘러 대문을 열었다. 비와 쓰레받기를 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아니었다!'. 마카로니 과자가 아니었다. 마카로니를 네 쪽으로 갈라, 마스카라로 속눈썹 올리듯, 끝이 살짝 말아 올려져 뒤로 젖혀진 감나무 꽃이었다. 매년 보는 꽃인데, 이렇게까지 헷갈릴까 싶다. 푸짐하게도 떨어졌다. 감꽃이 소복소복 쌓였다.

비를 들이대려는 순간, 맛깔스러운 꽃잎의 맛에 취한 민달팽이가 인기척에 뒤늦게 귀가하려는 듯, `아니었다'. 한두 놈이 아니다. 한 가족이 나들이를 나와 침낭인 듯, 감꽃 하나에 한 놈씩 자리를 잡았다. 집에 갈 생각은 아예 없다.

동이 튼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들이 제법 날아들었다. 벌이 떠나는 족족, 감꽃이 땅에 “툭”하고 떨어진다. 새벽이라 쏜살같이 내달리는 차량이 없고, `배달의 민족'도 질주를 하지 않으니, 벌이 제법 소리를 낸다. 비질 소리에, 감나무 꽃이 떨어지는 소리에, 벌의 소리가 감나무에 든다.

별안간 부는 바람에 “후두두” 한꺼번에 감꽃이 떨어진다. 그리고 작은 새들이 떼거리로 몰려든다. 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고양이가 아직 잠자리에 들고 있어, 잡혀먹힐 일이 없으니, 온전히 새들의 세상이다. 낭창낭창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잠시 앉았다가 이내 다른 가지로 옮겨 다닌다. 새가 둥지를 틀지 않는다는 나무인데, 새와 바람으로 채운다.

새가 자리를 뜨고 말라죽은 나뭇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낸다. 잔뜩 꽃대를 올린 수국 사이로 삭정이가 털썩 떨어진다. 죽은 가지를 전지가위로 잘라, 정리해 주려 할 때 그리도 힘들이게 하더니 너무나 쉬 죽은 가지를 내려놓는다. 새가 앉을 자리를 만들고, 바람이 지날 길을 만든다.

새로 돋은 가지에 감꽃을 떨구고 초록색 물만두를 달았다. 어린아이 입에 넣을 만한 손톱보다 조금 큰 물만두를 닮았다. 쑥즙으로 반죽한 듯 색이 곱다. 화살촉을 만들 만큼 단단한 나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는 단감과 둥시를 심었다. 추석 명절 차례상에 단감을 올리고, 겨울부터 다음해 추석 전까지는 곶감을 올렸다. 엄마는 가족이 겨우내 먹을 대봉을 심었다. 부모님과 이별을 하고 여섯 남매가 뛰어놀고 멍석을 펴고 가을걷이를 말리고, 도리깨질하던 마당에 정원을 만들었다. 25톤 덤프로 흙을 받아 마당을 높였다. 아내와 며칠간의 삽질로 한층 높아진 땅에 갖가지 나무와 꽃을 심었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목단과 감나무, 엄마가 좋아하던 영산홍과 대봉감나무에는 흙을 더하지 않았다. 행여 나무가 상할까 싶어서였다.

감나무 세 그루가 울타리 경계목이 되고, 집을 지켜주는 거목이 되었다. 손가락 마디처럼 가늘던 감나무는 이제 어른 허벅지만 하게 자라있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았다. 된서리가 내린 후에도 붉은 열매는 껍질이나 속이 같았다. 벌에게 꽃을 주고 새에게 열매를 내주었다. 낭창거리는 가지에 새가 쉬게 했고, 굵은 가지로는 고양이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잎은 넓으니 무더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가을엔 화려하게 웃어주었다. 그리 했지만 얻는 것은 없다. 단지 주어진 삶으로 받아들인다. 삶이 무엇인지 가늠하거나 대상을 대함에 한 치의 계산도 없는 바보 같은 삶 그 자체다. 단지 존재하고 함께하고 있다.

살아생전에 꾸며 드리고 보여드렸으면 좋았을 정원을, 자손이 살아가는 모습을 아버지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나무가 대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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