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이차(也?次)는 누구인가
야이차(也?次)는 누구인가
  • 양병모 충북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 승인 2023.05.14 18: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문화유산의 이야기
양병모 충북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양병모 충북문화재연구원 선임연구원

야이차는 한국고대사에 있어 단양지역 지방사 복원 연구에 중요한 인물이기에 찾아보게 되었다.

야이차! 역사수업 시간에 한 번쯤 들어 본 적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시험출제에 중요하지 않아 그냥 지나쳐 버린 역사인물 중 한 명으로 생각 할 수도 있다.

야이차는 단양적성 안에 세워진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 국보 제198호)에 나타나는 적성(赤城 지금의 단양) 출신 사람이다. 적성은 신라가 죽령 고갯길과 남한강 수운을 통해 한강유역을 진출에 따른 중요한 거점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적성비는 6세기 중엽 신라의 단양지역 진출시기를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978년 발견 당시 적성비의 상단 부분이 파손된 채 발견되어 정확한 판독과 해석의 어려움이 있다. 비의 건립목적과 내용은 전체 논지가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명의 고위 관료에게 교(敎)를 내려 적성공략에 공을 세운 야이차와 그 가족의 공적을 포상하고, 야이차 처럼 장차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겠다는 일종의 선전보고문(宣傳布告文)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하에 있던 적성을 실질적 새로운 영토로 편입함과 적성주민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는 과정에서 야이차와 연결고리를 찾아볼 수 있다.

적성비의 내용 중 야이차에 관한 기록은 절교사(節敎事)에 해당하는 6행 16자부터 7행 14자인 “赤城也?次□□□□中作善痛懷懃力使死人是以後, 其妻三□□□□□□□□□□□許利之”에서 확인된다. 이 부분의 정확한 해석은 어렵지만 “적성의 야이차에게 교하시기를…에 옳은 일을 하는데 전력을 다하여 죽게 되었으므로 이후 그의 처 와 가족(?)…에게…이익을 허락한다.” 라고 이해 할 수 있겠다.

이로 인해 신라로부터 받은 경제적 혜택은 처와 가족에게 돌아갔으며, 상속은 가족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야이차 가족들에게 상당한 은전(恩典 국가에서 주는 특별한 포상)을 내리고 또 별교(別敎)를 통해 앞으로 야이차와 같은 행동을 하는 자에게는 이와 동동한 포상 줄 것임을 선포하면서 야이차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므로 적성출신 야이차가 신라와 고구려의 적성공략 전투과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신라의 적성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면 그 상황은 어떠하였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야이차가 신라와 함께 전투에 직접 참여 한 가능성? 둘째, 적성지역 고구려군의 동향과 군사기밀을 신라에 제공 가능성? 셋째, 적성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 또는 신라에 편입되어 어떠한 역할을 수행 등 여러 갈래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야이차 공적의 행동에 대한 확실한 자료를 찾기는 힘드나 신라의 적성공략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근현대에 이르는 기간에 지역주민들의 활동으로 인해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역사적 사건들이 항상 있어왔다.

앞으로 한국고대사에 있어 단양지역의 지방사 복원에 중요한 인물인 야이차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는 신라와 고구려의 지방통치방식 그리고 적성인 야이차가 고구려 사람인지 아니면 예, 말갈 등 한국고대사에 나타나는 어느 종족 사람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