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카네이션에 담긴 원심(圓心)과 구심(求心)
붉은 카네이션에 담긴 원심(圓心)과 구심(求心)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0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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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난생처음 실감할 수 없는 어버이날을 겪었다. 올해 나는 마침내 `고아'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평균적인 삶을 사는 대부분 삶에서 결국 `고아'가 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단장(斷腸)의 비극'은 드문 일이고, 우리는 행여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늘 조심(操心)하면서 부모와 자식 사이 세월의 흐름에 순응한다. 그러므로 언젠가 `고아'가 되는 일은 두려워하거나 외로워할 일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꽃집마다 풍성한 빨간 카네이션이 이다지도 낯설고 서러운 꽃이었음을, 새해 벽두에 어머니를 여의고 맞는 첫 어버이날에 통렬하게 깨닫는다.

어머니 살아계시는 동안의 나는 언제나 탈출을 노리던 원심(圓心)의 세상만을 겨냥했다.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언제나 나를 지탱해주던 그 엄청난 힘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세상을 향해 속도를 내는 내 모든 회전력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구심력 덕분이었음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것은 둥근 원과 같다.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연(緣)이 만들어진 태생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혹은 자신의 우주를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식의 원심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언제나 어버이의 구심력이다.

우리는 세상의 원주(圓周)를 끊임없이 돌며 운동의 힘과 크기를 키우는 원심력을 성장과 발전의 원동력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심력을 확신하며 욕심내는 모든 성장과 발전을 향한 속도와 힘과 크기는 든든하고 위대하게 중심에서 버티는 구심력 덕분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간절함이 유난히 사무치는 것은 후회와 아쉬움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작년까지 몇 해 동안 나는 어머니의 물리적 존재가치를 어버이날이거나 다른 특별한 날에 `면회'나 하는 파렴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몇 가지 파는 음식을 사들고, 시든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당당하게 내밀며 나의 구심(求心)이 위태로워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마침내 어머니를 여의고, 실체와 존재의 부재를 실감하게 된 첫 번째 어버이날에 이르러 카네이션 붉은 꽃송이가 얼마나 서러운 것이며, 의무적이며 사회적이고, 격리된 상태에서의 면회조차 얼마나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인가를 비로소 깨닫고 있다.

구심(求心)의 숭고한 가치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휘둘렀던 원심(圓心)의 세계는 고립이다. 스스로 존재 이유를 내세우는 세상의 모든 욕망은 `사회 원심력'에 해당하며 `고립'은 그런 분주함에 있다. 그러므로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위로받으려는 세상의 모든 각자들이 머무는 공간은 대체로 닫혀 있는 것과 다름없다.

구심을 잃고 절제하지 못하는 원심이 혼자만의 능력으로 성장과 발전의 속도와 크기를 키우고 넓히는 일은 없다. 구심이 잡아주지 못하는 모든 회전은 결국 제 스스로의 힘과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세상의 모든 동력은 구심에 있다.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놓지 않으며 원심력을 만드는 구심력은 쉽게 느낄 수 없다. 세상이 아무리 힘차게, 욕심을 다해 멈추지 않고 돌아가기에 골몰하는 원심에 열광한다 해도 결국 모든 본질은 구심에 있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든든하고 꼿꼿하게 버티면서 자꾸만 벗어나려는 원심을 지키는 구심은 고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각자의 원심은 구심과 끊어질 수 없는 연결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그런 무수한 구심의 이어짊과 버팀, 그리고 관성을 통해 `사회 구심력'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붉은 카네이션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낯선 오월. 나를 지탱해주던 구심은 잃었으나, 이제 내가 비로소 구심이 되어야 할 차례. 어버이를 여읜 자식들의 설움과, 자식을 잃은 어버이들의 피눈물이 꽃집 유리창에 빨갛게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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