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숙제가 캐어 먹은 것은?
백이숙제가 캐어 먹은 것은?
  • 우래제 전 충북 중등교사
  • 승인 2023.05.03 2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우래제 전 충북 중등교사
우래제 전 충북 중등교사

 

나의 초가삼간 시골집은 거의 정남향이다. 비교적 높은 산마루에 자리 잡아 앞 뒤 옆이 모두 산으로 들러 쌓여있다. 다만 앞쪽으로 틔여져 밤에는 멀리 대전 식장산 미군 부대의 불빛이 보일 정도이다.

마루에 앉아서 보면 왼쪽으로 일자(一)로 쭉 뻗은 산이 보인다. 보이는 그대로 일자봉이다. 그 일자봉이 끝나는 지점을 `끝탕' 또는 `끌탕'이라고 한다. 그런데 구순이 가까운 고종사촌형수가 그 일자봉 끝탕에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다녀오라고 한다.

예전에는 갈잎이 손바닥만큼 너플너플할 때 고사리 꺽던 곳인데 지금은 더 일찍 가야 한다며 재촉한다. 그러면서 예전에 전염병이 돌아 애들이 죽으면 묻었던 곳, 애장터란다. 홍역, 천연두등 전염병이 돌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아이들은 따로 묘를 만들 수는 없고 주로 묻어 주는 곳이 그곳이란다.

환갑 넘도록 살면서 처음 듣는 소리다. 공연히 그런 소리는 해서 찜찜한 맘이 들게하니 참. 그렇지만 요즘은 내 고향 산이지만 산불감시원의 눈치 때문에 산에도 맘 놓고 다닐 수 없는 상황, 엊그제 비도 왔기에 산불감시원에게도 덜 미안할 것 같아 배낭을 챙겨 산을 올랐다.

고사리는 양치식물이다. 양치라는 말은 고사리 잎이 양의 이빨(羊齒)처럼 가지런히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보통 양치식물은 꽃이 피지 않아 열매도 없다. 그래서 포자(홀씨)를 만들어 번식한다. 보통 양치식물에는 석송류, 속새류와 함께 고사리류(fern)가 포함되는데 고사리류가 대부분이다. 양치식물은 고생대부터 출현하여 지금까지 진화해온 오래된 원시적인 식물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석탄은 양치식물이 땅속에 묻혀 만들어진 것이다. 석탄이 되었던 그 양치식물은 기후변화로 사라지고 지금의 양치식물은 전의 양치식물보다 훨씬 후에 새로 출현한 종이다.

백(伯)과 숙(叔)은 상(商)나라(은이라고도 함)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왕자였는데 왕위를 양보하고 주(周)나라로 갔다. 그런데 주나라의 무왕이 상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였다. 이에 백과 숙은 신하(주나라 무왕)가 천자(상나라 주왕)를 토벌한 것은 인의(仁義)에 위배된다고 주나라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들어갔다. 이들이 여기서 지었다는 시가 `채미가(采薇歌)'다.`登彼西山兮(등피서산혜=서산에 올라) 采其薇矣(채기미의=고사리를 캐도다)'이 고사 때문에 고사리는 절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 싯귀의 `薇(미)'를 두고 다른 해석이 있다. 자전에는 이`薇'자가 `고비, 들완두'라고 나온다. 문제는 상(商)나라가 멸망한 시기가 겨울인데 어떻게 고사리나 고비를 먹었겠느냐하는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연한 줄기만으로 3년을 버티기는 어려웠을 거란 이야기다. 따라서 `薇'는 고비나 고사리가 아닌 `들완두'라는 것이다. 완두라면 잎과 줄기 열매를 모두 먹을 수 있기에 이것을 먹고서 3년 동안 안색이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젠 백이와 숙제가 무엇을 먹었는지는 그들만이 아는 일, 고죽국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백이숙제는 우리 민족이 아닌가? 淸代(청대)의 유명한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의 고증에 의하면 무왕이 주를 치러 갔을 때는 백이와 숙제는 이미 죽고 세상에 없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는 것이 거짓일까? 한참을 올라 보니 아차! 한발 늦었다. 벌써 쑥 올라와 잎새가 활짝 피어버렸다. 그래도 미련을 두고 한참을 돌아다녀 겨우 한 주먹 꺽었다. 벌목하고 줄 맞추어 심어 놓은 소나무를 키우려고 다른 나무들을 다 잘라버렸다. 줄기가 싹둑 잘린 진달래, 산철쭉이 보인다. 어차피 올해 또 잘려 나갈 것이고 소나무가 크면 저절로 사라질 거란 생각에 여남은 포기 캐왔다. 시골집 길가에 심으려고. 고사리는 못 꺽고 새 일거리만 만들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