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부는 날에
봄바람 부는 날에
  • 연서진 시인
  • 승인 2023.05.0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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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연서진 시인
연서진 시인

 

“암일 가능성은 90%입니다. 신장암 1기로 보이지만 수술해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의사의 말은 더없이 건조했다. 심장이 쿵쿵 요란하게 뛰는데 오늘도 세상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숲을 걸었다. 향기로운 봄바람이 수풀 사이로 불어온다. 온몸에 닿는 바람이 숲 향기에 취해 걷다 보니 나뭇잎 사이로 생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속내를 흩고 지나간 감정이 울컥 쏟아질 때 살랑이는 풀의 스침은 지난날 행복했던 기억을 상기시켜 주듯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기관지가 좋지 않아 나의 미용실엔 늘 공기청정기가 쉼 없이 돌고 있다.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문을 열어 놓고 수시로 환기를 시키지만 요즘 같은 봄이면 미세먼지와 꽃가루까지 덤으로 날리니 문 열기가 무서울 지경이다. 늘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나는 미세먼지가 많은 날엔 마스크마저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과 쏟아지는 가래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암이라는 혹까지 생겨 이래저래 내겐 잔인한 사월의 봄이다.

지난해 노래하듯 말했다. 딱 석 달만 쉬었으면 좋겠다고… 기관지확장증을 앓는 내게 또 다른 병이 생겼으니 이젠 쉬어야 할 확실한 명분이 생겼다. 수술 날짜를 잡고 온 나는 남편과 아들 둘을 불렀다. 덤덤히 암인 것을 말하니 큰아이는 오열했고 남편은 믿을 수가 없다며 재차 물었다. 나와 검진을 함께 했던 작은아이는 미리 예견된 결과에 눈시울만 붉혔다. 몇 년 전 나의 기억상실 증세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큰아이는 왜 엄마가 이렇게 힘든 일들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나를 끌어안고 운다. 운다고 잃어버린 건강이 다시 돌아올 것 아니고 생존율 90%인 1기라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가족들을 위로했다. 어차피 생긴 일, 이왕이면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했다. 남편의 얼굴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처럼 위태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찾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카톡 메시지를 남기고 일주일 동안 예약된 분들을 마지막으로 미용실을 닫았다. 이왕이면 좋은 사람이 왔으면 싶었다. 다른 누군가 오지 않으면 시설 모두 철거해야 할 마지막 상황을 생각하니 처음 이곳을 꾸미던 때가 떠올라 울컥했다.

오랜 시간 하던 나의 일을 그만두자니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막막해진 나의 고객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숙제를 남겨둔 내게 그동안 감사했다며 치료 잘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고 따뜻한 마음을 건넨다.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나를 위해 배고플 때 먹으라며 한 아름 빵을 안기는 분, 지나는 길에 김밥 샀다면서 슬그머니 놓고 가시는 분, 바쁠 텐데 언제 반찬을 하냐면서 밑반찬을 만들어 주시는 분들… 그동안 따뜻한 사랑을 넘치게 받았다. 내가 늘 웃을 수 있는 이유도 이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감사할 일이다.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바쁘던 내게 하루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주어졌다. 건강과 바꾸고 휴식 같은 날들을 선물로 받았다. 남편은 그간 소홀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내 손을 맞잡았다. 손의 온기인지 진심을 전하는 마음 온도인지 모를 온도는 더할 수 없이 따뜻했다. 어쩌면 인생은 시계를 사러 갔다 시간을 배우고 오는 건 아닐까….

숲으로 갔다. 흙이 시작되는 길에 양말과 신발을 벗어들고 걸었다. 간밤에 내린 비로 발에 닿는 땅의 감촉이 보드랍다. 비를 머금은 숲은 생기가 돌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과 봄바람은 더없이 싱그럽다. 찰박찰박 걷는 소리, 쉴 틈 없이 들려오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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