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서 다행이다
봄이라서 다행이다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05.0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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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아침이 여유롭다. 출근 시간에 쫓겨 허둥대느라 전쟁터이던 아침이 느슨한 평화로 바뀌었다. 급하게 차리던 아침상도 서두를 게 없는 일상이다. 처음 맛보는 초콜릿을 입안에 넣은 달콤함이 느껴진다. 백수가 되어 누리는 호사다.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잊고 지낸다. 굳이 기억하고 살 이유가 없다. 그이를 출근시키자 내 세상이다. 아파트의 작은 공간이 온통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다가 거실로 들어온 한낮의 볕에 낮잠이 밀려들어도 가만히 둔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

백수가 되어서도 아침에 빼놓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화장은 민낯이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정리가 안 된 기분이 싫어서다. 무언가 지저분하게 널려있어 머릿속도 말끔하지가 않다. 더 늘어지게 되고 해이해지는 것 같아서다. 남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야 비로소 마음의 여유도 제동이 걸린다. 내 오랜 습관이다.

다 제쳐놓고 엉망인 채로 글을 써야만 잘 써진다는 이도 있다. 나로서는 이해 불가다. 주위가 어지러우면 생각이 서로 뒤엉켜 엉망이 되는 느낌이다. 아무리 급해도 잘 정리가 되어 있어야 차분해지고 글 쓸 마음이 생긴다. 누군가는 유난스럽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게 내 버릇이 되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몇 줄을 채우지 못하고 밖이 궁금하여 눈길이 창문으로 향한다. 잎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이 싱그럽다. 유난히 바람을 타는지 파르르 떠는 잎은 힘에 부쳐 보인다. 분명 같은 바람일진대 살랑이는 잎도 있다. 나무나 사람이나 똑같은 바람이 아닌 건 마찬가지인가보다. 눈을 옮겨보면 온 천지가 색색으로 피어나는 요염한 꽃들로 가득하다. 이 고운 4월을 엘리엇은 왜 가장 잔인한 달이라 했을까.

4월만 되면 나는 이 구절이 화인(火印)처럼 박혀있다가 떠오른다. 당시의 사회상을 떠나 한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프랑스 유학 시절, 그와 절친했던 의대생 친구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전갈을 받았다고 한다. 스위스 로잔에서 요양하며 글을 쓰고 있을 무렵이었다. 엘리엇은 그 친구가 라일락이 핀 공원을 가로질러 오는 듯한 환상에 몸서리쳤다고 했다. 라일락이 그에게 있어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상처였다. 꽃이 피는 4월이 아픈 이유였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겨울이 오히려 더 따뜻했다고 `황무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위에 보이는 밭들은 이미 작물이 심어져 푸릇하다. 그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다 안되지 싶었다. 농막의 텃밭을 황무지로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농사라야 고추 몇 포기, 가지 몇 포기. 오이도 심는다. 상추는 종류별로 조금씩 밭을 메꾼다. 모종을 심으며 어느 때보다도 더 정성을 들인다. 물을 주고 꾹꾹 눌러 다져준 뒤 흙으로 잘 돋군다. 어여쁘다. 이 키 작은 생명에 애착이 간다. 그이가 아프기 전까지는 건강의 소중함을 몰랐다. 몸을 챙길 줄 몰랐다. 쓰러지지 않으면 괜찮은 줄 알았다.

엘리엇의 잔인한 4월처럼 나에게도 아프다. 꽃이 피어도 기쁘지 않은 봄. 세상을 밝히는 꽃이 있고 나무들의 싱그런 신록을 볼 수 있어서, 자꾸만 풍경이 나를 끄는 그런 봄이어서 다행이다. 칙칙한 겨울이었다면 싸매고 어둠 속으로 더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춥다고 문을 꼭 처닫고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이 봄이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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