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
종전선언
  • 김일복 시인
  • 승인 2023.04.25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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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일복 시인
김일복 시인

 봄의 출현이다. 눈 녹은 밭에서 지난가을에 뿌려 놓았던 시금치 싹이 올라온다. 덩달아 겨우내 버틴 냉이도 꿈틀거린다. 춘 사월 봄바람이 살랑거린다. 저 멀리 파자마 입은 댕댕이도 꼬리를 흔들며 밭을 휘젓고 다닌다. 올봄에 시집을 갈 모양이다.
 딸아이가 결혼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축복된 역사적인 날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텅 빈 세상이다. 마지막 남은 눈물까지 다 흘렸다. 뭔 놈에 푸른 하늘은 높기만 한지, 순간 정지된 느낌이다. 딸아이 결혼으로 가족의 기쁨은 어느 순간보다 더 컸다. 신의 믿음으로 거룩한 시간이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아빠 이제 술도 끊고, 옷도 자주 갈아입고 깨끗하게 살아. 그리고 아빠 할 만큼 했어,” 
지겹게 듣는 말이지만 할 말이 없다. 사실 술보다 담배를 먼저 버렸다. 그만큼 술을 좋아했다. 술을 먹지 않는다면 삶과 연결고리가 끊어져 숨이 멈추는 것과 같았다. 어릴 적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시작된 음주가 막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왔나 보다. 
 너 나 우리 그렇게 옷을 뒤집어 입고 있었다. 양발은 각각 검정과 흰색으로 베일에 감싸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하루에 한 번 목욕하지 않으면 몸에서 냄새가 나고, 본의 아니게 밥을 흘리면서 먹거나 반찬을 묻히거나 할 때마다 내가 어머니에게 했던 대로 딸아이는
 “아빠 흘리지 말고 천천히 드세요.”
 그랬다. 나는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나 보다, 모든 일을 술과 연관 지어 말하는 딸이라 의미심장했다.
나는 보편적이거나 착하지 않다. 나는 날카롭고 까다로운 성격이며 내가 나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지니고 살았다. 내 마음에 마귀가 들어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평생 마귀와 싸웠다. 사람들이 나에게 꼴통이다. 별난 사람이다. 하지만 내 안에 마귀가 있다는 걸 스스로 알았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도 나는 계획성이 없었다. 순간의 선택을 믿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다고 무모하게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내 영역에 벗어나는 일이나 내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로 부딪치면 극복하기가 힘들었다. 그때마다 술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나는 억지로 술을 먹었고 술로 의지하며 살았다. 
 어쩌면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고독이었다. 내게는 정의나 진실 따위는 개똥이었다. 나는 비딱하게 서 있는 나무가 좋고,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좋고, 산속에서 혼자 울며, 기타 소리와 우수에 젖는 노래가 좋았다. 묵묵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도 좋았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거나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나 혼자 짝사랑하는 것도 내 마음이다. 
 신의 눈물이라고 우기며 먹었던 술의 근원지인 눈에서 병이 생겼다. 오만했던 내게 벌이라도 내리는 것인가? 양쪽 눈에 알레르기가 찾아왔다. 가렵고 심하게 눈곱이 끼고 충혈되는 증상이 동반되고 이물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의사는 원인을 모르지만, 술을 먹지 말라고 했다. 염증이 생길 우려가 크다는 이유였다. 경과를 봐야 하지만 큰 병원에 가서 정확히 검진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진단이다. 
 이런 젠장 나이를 먹으니 별일이 다 생긴다며 투정을 부렸다. 치료하면서 나는 술을 버려야 하는지 테스트했다. 열흘 동안 금주하고 눈 상태가 좋아지면 소주 2병이나 먹었다. 궁금했다. 역시나 눈곱이 더 심해졌다. 또다시 한 달 뒤에 또 2병을 먹었다. 마찬가지로 증상은 더 심하게 충혈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까지 술을 먹어야 했다.
 흔들리는 삶에서 늘 순간의 선택이 숙명처럼 나를 이끌어 줄 거라는 믿음으로 반복된 세월을 보낸 것이다. 술을 먹는 이유는 가지가지다. 끝내 참지 못하고 순간의 선택이 오면 불안한 마음에 술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 두렵다. 이러다 실명이 되면 어쩌나? 겁이 난다. 술을 먹기 위해 이유를 만들거나 잔꾀를 부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간절한 화살기도를 나도 모르게 바치고 있었다.
 이제 낮은 언어와 부드러운 지혜로 환골탈태한다. 새로운 세상을 맛볼 것이다. 아침답게 아침을 맞이할 것이고, 좋은 느낌과 좋은 향수를 느껴야겠다. 누구나 전쟁 같은 사랑과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안다. 누가 이기고 지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삶은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종전선언으로 집안은 평화로운 분위기이다. 나는 불안하지만 스스로 극복해야 했다. 그것이 우연과 행운을 버리는 일이다. 술과 이별하고 분수에 맞게 생활한 지 벌써 일 년이 되어간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가끔 술상을 차려 놓고, “여보 한잔할래?” 하는 유혹에 시달린다. 끝나지 않은 전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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