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꽃 흔들린다
냉이꽃 흔들린다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3.04.1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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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어제까지 게이트볼을 함께 했던 김 회장의 궂긴 소식이 오늘 날아들었다. 연세가 있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 운전하고 다닐 정도로 건강했던 분이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잠 잘 자고 일어나 아침 식탁에서 수저를 떨어뜨리고 그 길로 그냥 가셨다던가? 이왕에 가시는 길, 고통 없이 가셔서 그나마 호상이라고 한마디씩 하면서도 여기저기서 끌끌 혀를 차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간 잘 살았다 / 잘 놀았다/ 이제 해는 기울고/ 우리는 돌아가야 하리// 주섬주섬/ 앞서거니 뒤서거니 / 떠나는 사람들'

회원들은 공을 치던 스틱을 벽 쪽에 던져 놓고 슬금슬금 밖으로 나간다. 폐교된 학교 운동장의 구석진 게이트볼장 출입문은 서쪽으로 향해 있다. 농수로가 질러가고 논과 밭들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산골 마을, 멀리 솟아있는 불정의 공수봉으로 지금 막 해가 지고 있다.

오늘은 요즘 들어 드물게 화창했던 날이다. 꽃샘바람마저 조용했다. 또 한 사람이 떠났다. 회원 중에 한 해에 한두 사람씩은 저세상으로 가고 마는 서글픈 심사 때문인지 저물면서 일어나는 바람마저 심란하다.

밭둑에 냉이꽃들이 하얗게 번져 있다. 바람결에 눈을 깜작이듯 작은 몸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어서 가자, 어서 가자, 서둘러 이끄는 듯하고 냉이꽃들은 그 작은 몸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인다. 지는 해마저 힘없는 얼굴로 멍하니 지켜보는 것 같다. 또 한 생명이 사라졌다. 재벌이든 이름 없는 촌노든 거지든 죽음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던가? 하나의 일생이 대하소설처럼 스펙타클한 사연들일지라도 생명과 함께 그 일생은 흔적 없이 묻히고 만다. 거품처럼 물 떠먹은 자리처럼 흔적도 남지 않는다.

밭둑에 모여 흔들리는 무수한 냉이꽃 무리들을 바라본다. 너무나 작고 여린 풀꽃이어서 개체로서의 냉이꽃 모양은 또렷하게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핸드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고, 그것을 확대해 보고서야 냉이꽃의 윤곽이 잡힐 정도로 작은 풀꽃들이다. 하찮다. 짓밟혀도 아무런 말 못하는, 그러나 그 작은 씨앗이 꽁꽁 언 땅을 뚫고 솟아나 자라고 꽃피며 열매 맺어 내일을 마련한 뒤에야 사라지는 일련의 일들을 그저 하찮다고 치부할 것이 못 된다.

인간의 일생이나 하루살이나 냉이꽃이나, 모두 사람과 다를 바 없다. 냉이꽃이 씨앗이란 견고한 틀을 깨뜨리고, 더욱이 꽁꽁 언 땅을 솟구치는 마력 같은 기적으로부터 시작되는 삶을 곰곰이 떠올려 보면 하찮다는 말은 도저히 꺼낼 수가 없다.

생명체들의 생로병사, 하루살이라고, 냉이꽃이라고, 사람보다 못하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생명체들이란, 나름 장편소설 분량의 꿈과 사랑과 일과 치열함이 있고 생이 다하면 김 회장처럼 어느 날 가뭇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다를 바 없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문맹이 예사이던 시절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관직을 거쳐 중소기업도 운영한 터라 사람들은 원도 한도 없이 멋지게 살다 가신 분으로 기억하겠지만, 욕심껏 산 죄, 죄가 많다는 후회의 말이 생애 마지막 종지부가 되었다.

월마트 창시자 샘 월튼도 그랬다. 평생 돈 버는 데만 올인한 생으로 그의 사전에 후회는 없다고 기염을 토했다는데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기면서 막상 죽음 앞에 섰을 때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I blew it ”(내가 다 망쳤어).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것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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