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이유로
자기의 이유로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3.04.1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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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이곳으로 몸과 마음을 이사시키던 전날도 여행가는 날처럼 밤잠을 설쳤다. 요양을 위해 떠나는 길이 마치 유배지로 가는 마음이어서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건강을 담보로 한 제주행은 내가 죄인이 된다. 그이를 이만큼 아프게 만든 것도 나인 것 같아 자책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리도 무디었을까. 옆에서 늘 지켜보고 있었으면서도 병을 알아채지 못했다. 분명 전조증상이 있었다. 그이가 종종 피곤하다고 한 말을 흘려 넘겼다.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눈치를 챘더라면 더 빨리 치료를 받게 할 수 있었으련만. 속에서 곪아 터지도록 모르고 있었으니 나는 방관자였다. 남의 일처럼 무관심했던 죄. 방관죄로 대가를 치를 생각이다.

그이가 무서운 병이라는 걸 알고서도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이가 약해질까 봐 겁이 나서 이를 악물었다. 수술실로 들어갈 때도 울지 않았다. 그 앞에서 초조히 기다리는 내게 창밖으로 들어오는 벚꽃은 왜 이리 예쁜지. 꽃잎 위로 부서지는 햇볕에 눈이 부셨다. 너무 고와서 눈물이 났다. 이 꽃들을 보고 감탄을 할 수 없는 내가 슬퍼 울었다. 그이 앞에서 다잡았던 눈물이 꽃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1시간 30분 만에 그이가 나왔다. 수술실 앞에는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 복도에서 기다리는 보호자가 없었다. 병원 측에서는 병실에 가 있으라고 했건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이는 나오자마자 나 먼저 찾는다. 내 성격을 뻔히 알기에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보다. 보자마자 그이의 손을 꼭 잡았다. “여보, 고생했어.” 그이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백수인 나는 제주살이로 그이의 껌딱지가 되었다. 온종일 붙어 다닌다.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귀찮더라도 졸졸 따라다닐 참이다. 하루의 일과가 산에 가는 것, 좋은 곳에 가서 바람 쐬는 일, 분위기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일. 둘은 이렇게 제주 생활을 즐기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매력에 빠져든다.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처음 들었던 유배라는 생각은 바뀌고 있다. 날마다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섬.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모습에 홀딱 반한다. 암울한 이유도 점점 더 퇴색되어 간다. 볼수록 빠져드는 바다와 갈 때마다 신비로운 산은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화두를 던진다. 순간 안갯속이던 머리가 맑게 걷힌다.

멕시코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조각상이 있다. 작가가 조각상을 만드는 도중에 사고로 오른손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이 작품이 완성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이들의 생각을 뒤엎고 왼손으로 작업을 해 더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다. 사람들이 작가의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해 붙여준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프고 슬프다고 주저앉아 있는 일은 길 없는 숲을 헤매는 것과 같다. 실망하고만 있다면 마음은 수렁으로 빠져 더 힘들어진다. 의사가 퇴원하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당부도 이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몸은 마음에 순응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이유로 이 삶을 사랑하려 한다. 그이에게 싫어, 안 돼라는 부정적인 말을 안 하려는 것도 죗값이라 여긴다. 때로는 케어로 지치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것도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해지기로 했다.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고 그이에게 의지가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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