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을 걷다
봄밤을 걷다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3.04.1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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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유치원 앞마당에 살구나무가 꽃을 피웠다. 부모가 자식을 키워내듯 추운 겨울을 버텨내고 오종종하니 아기 같은 꽃들을 많이도 잉태했다.
절대 다시는 꽃피울 것 같지 않던 고목에서 어쩌면 저리도 고운 꽃을 달았을까.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에 아침 출근길이 절로 설??다. 엊저녁 퇴근할 때 잠깐 서서 바라보았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니 한층 더 풍성해졌다. 나무는 밤에도 쉬지 않고 꽃을 피웠나 보다.
집 앞 공터 홀로 우뚝 선 벚나무에도 꽃이 만개했다.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사이사이로 분홍빛 꽃잎이 나비처럼 군집을 이루었다.
아침 출근길을 잠시나마 설레게 만드는 이 나무의 매력은 저녁을 먹고 난 후 산책을 나서는 시간에 더욱 빛을 발한다.
어둠이 전부인 단조로운 배경 앞에서 별처럼 하늘하늘 사위를 온통 반짝이게 한다. 봄밤이 사계절 중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는 이런저런 꽃나무들이 제 몫을 다하기 때문이리라.
저녁을 먹고 나면 한 시간씩 집 근처 천변을 따라 산책길에 나선다. 목적은 날로 무거워지는 몸무게를 내려놓기 위한 가벼운 운동이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봄꽃에 흠뻑 취해버린다.
꽃향기를 싣고 불어오는 달큰한 바람이 참 좋다. 어제는 한껏 웅크린 채 얼굴을 숨겼던 꽃봉오리가 하룻밤 사이에 활짝 고개를 들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가벼운 옷차림에 강아지를 데리고, 혹은 아이와 함께, 나이 지긋한 어르신 내외인듯한 분들까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긴 시간 한 몸처럼 따라다녔던 마스크를 걷어내고 대신 저마다의 얼굴에는 활짝 꽃을 피웠다.
금아 피천득 선생이 쓴 「봄」이라는 수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복숭아,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 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마흔 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이 아니다.” `마흔 번'이라는 숫자가 말하듯 피천득 선생은 아마도 마흔 살 때 이 수필을 썼을 것이다. `마흔 번'의 봄을 맞이한 것도 `축복'이라 했는데 그보다 십여 년을 더한 봄을 맞이하고 있으니 나는 선생보다 더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올해는 유독 많이 하는 중이다.
꽃이 이렇게 예쁜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 해마다 한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이었건만 속절없이 눈으로 가슴으로 마구 밀고 들어 온다. 누군가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농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두서없이 피어난 길가의 제비꽃도 예쁘고 아이들 놀이터 입구에 핀 목련과 봄의 전령사라고 하는 벚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번 주까지 마감 지어야 할 원고가 책상 위에서 재촉하고 있고, 문학회 회원들을 이끌고 문학기행 준비도 해야 하는데 봄꽃이 놓아주질 않는다.
벌써 여러 날 봄밤을 걷는 중이다. 직장에서 혹은 삶에서 체력을 바닥내고 천근만근 무거운 걸음으로 퇴근해도 봄밤의 풍경에 이끌려 걷게 된다.
코로나를 떨쳐내고 근 삼 년 만에야 제 자리로 돌아온 일상들이 그저 감사하고 반갑기만 하다. 하루하루가 긴 겨울 같았던 터널을 꿋꿋이 지나, 혹독했던 날들을 무사히 이겨내고 맞이하는 봄.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봄의 숲속에서 솟아나는 힘은 인간에게 도덕상의 선과 악에 대해서, 그 어떤 현자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라고 했던가.
봄밤을 걷고 있으면 저절로 묵상이 이루어진다. 온갖 번잡함을 사라지게 한다. 자연이 가르쳐주는 소중한 삶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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