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政爭)-동인과 서인
정쟁(政爭)-동인과 서인
  • 김경수 시조시인
  • 승인 2023.04.1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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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경수 시조시인
김경수 시조시인

 

그들이 분열했다. 숱한 사화로 희생을 치뤄가며 훈구파를 몰아내고 어렵게 정권을 장악한 사림이었지만 결국 대립하면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 분당이 되고 만 것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이조정랑 자리였다. 이조정랑 자리는 전랑자천제에 의해 전임자에게 후임자의 추천권을 줌으로써 이조정랑에 대한 대신들의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만들어진 제도였다. 무엇보다 한번 전랑이 되면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출세가 보장된 자리였던 것이었다.

그럴만한 이유는 비록 당하참상관에 지나지 않았지만 삼사 관리의 추천권은 이조정랑에게 그 전권을 준 것이었다. 누구보다 김효원은 젊은 사대부 중에서 명망이 높았으므로 추천자인 오건이 자연스럽게 김효원을 추천한 것이 사림이 분당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 이유는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 것을 심의겸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효원을 윤원형의 식객으로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김효원은 난처한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어느 날 심의겸은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에 기거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런 그가 김효원의 과거를 문제 삼아 반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심의겸이 이토록 김효원의 이조정랑 취임에 극렬히 반대하자 김계휘가 말렸다. 아마도 김계휘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는 뜻 같았다. 어쨌든 김계휘는 그것은 김효원이 어렸을 때 일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심의겸이 실권도 없을 때였다.

어찌 됐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이조정랑이 된 김효원은 이 직책을 이용해서 자연히 하나의 세력을 형성해 나가는 한편 심의겸이 자신을 반대한 것에 대한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기회는 오래가지 않아 찾아왔다.

김효원의 뒤를 이어 이조정랑의 물망에 오른 인물은 공교롭게도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었다. 그동안 벼르고 있던 김효원은 앙갚음으로 심의겸에게 인신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이조정랑 문제로 김효원과 심의겸이 싸우게 되자 사대부들은 둘로 나뉘어 대체로 젊은 사대부들은 김효원을 지지하였고 노장 사대부들은 심의겸을 지지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하나이던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자체 분열한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허엽이 박순을 가십한 일로 그마저 조정과 사대부들의 의견이 더 크게 둘로 갈렸다. 이는 이조정랑 문제에 이어 사림이 둘로 분당하는데 일조했다. 이들 중에서 김효원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동인이라 불렀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의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의겸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는데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의 정릉방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며 정쟁을 이어나갔다.

어찌 보면 정쟁과 분열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심의겸의 반대가 없었거나 김효원이 심충겸에 대한 반대가 없었다면 어찌되었을까 그렇게 된다고 당을 만들고 정쟁을 벌이며 권력 다툼을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보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정쟁은 배제될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이 때론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만한 존재가치를 지니고 있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긍정적이고 이유가 있는 정쟁을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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