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 승인 2023.04.1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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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신찬인 전 충북도의회 사무처장

 

남녘에 봄이 무르익었다. 흐드러지게 폈던 봄꽃이 피고 또 진다.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에는 맑은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다. 평화로움이랄까, 나른함이랄까, 죽음과도 같은 고요함이랄까. 인적이 끊긴 진도 팽목항에는 침묵과도 같은 슬픔이 눅눅히 고여 있었다.

기억관이라고 이름 붙여진 허름한 컨테이너는 녹이 슬어 을씨년스럽고 철망에 매달린 수많은 노란 리본만이 이곳이 9년 전 세월호 사고가 났던 곳임을 알게 한다.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 304명의 죽음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자니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추모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바닷가 철망 앞에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이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9년 전 사고를 당한 누군가의 가족이리라.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사람을 잊지 못해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거다.

여인을 지켜보면서 한 줌의 고통이라도 함께 해보려 하지만 난 그 고통을 짐작할 수조차 없다. 가슴이 미어지는 먹먹함인지, 팔다리가 끊겨 나가는 통증인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절망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한다는 게 참 어설프다는 생각이 든다.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앞에 그저 잠시 머리를 숙이고 돌아선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 있었던 걸까.

세상은 그날의 사고를 304명의 죽음이 있었던 사고로 기록한다. 하지만 저 여인처럼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간직한 가족과 친구들까지 헤아린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했을까 가늠하기 어렵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 것은 내 삶의 일부를 베어내는 것과 같다. 내가 그 사람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 사람이 나를 필요로 했던 만큼, 내 존재의 의미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죽음처럼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는 여인의 아픔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하다.

두 손을 모은 여인의 손목에 묵주가 걸쳐 있다. 무엇을 기도하는 걸까. “아가야! 잘 지내고 있니. 살아생전 너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짧아 엄마는 늘 마음이 아프구나. 좀 더 많이 이해해 줄걸, 좀 더 많은 사랑을 나눌걸, 좀 더 많은 추억을 만들걸, 모든 것이 아쉽고 후회되는 일뿐이라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구나. 그래도 가장 후회되는 일은 제주도 여행을 보내서 너를 차가운 바닷물에 빠뜨린 것이란다. 미안하구나, 용서해다오. 엄마가 죄인이구나. 보내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러다 “하느님! 우리 아이 잘 있는지요. 무엇이 급해 그리 서둘러 데려가셨는지요. 그 아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리도 깊은 물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셨는지요. 죄가 있다면 저를 벌하시지, 어찌 아직 피지도 않은 어린 생명을 거두셨는지요. 그 아이는 제게서 떠났지만, 저는 그 아이를 차마 보낼 수 없습니다. 너무도 보고 싶습니다. 간절히 기도드리옵나니, 이 끝없는 고통에서 죄인을 구해주소서.” 아마 그런 기도이지 싶다.

우리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무칠 때 기도한다. 기도를 하는 것은 용서를 비는 것이요, 용서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내게 찾아온 불행을 스스로 용서하고 원망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때, 마음의 고통을 잊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그 여인 또한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 본다.

팽목항을 떠나면서 나에게 물었다. 너는 누군가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한 적이 있는가, 너는 누군가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한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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