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 김진숙 수필가
  • 승인 2023.04.0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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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김진숙 수필가
김진숙 수필가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무심천변의 벚꽃 구경을 하다가 문득 입에 붙은 노래이다. 얼마나 절절한 노랫말인지 같은 사연도 없으면서 한참을 읊조렸다.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님을 찾아 꿈길로 나섰는데 그조차도 길이 어긋나 만날 수 없었다니 그 안타까움이 오죽했으랴? 당대의 명기 황진이의 맺을 수 없는 사랑을 떠올리며 봄꽃 어우러진 천변을 오래 걸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혼자 하는 사랑, 둘이 같이하는 사랑, 집착에 가까운 사랑, 이 사람도 사랑하고 저 사람도 사랑하는 카사노바식 사랑,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륜도 있으니 고결하다는 사랑의 모습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도 같다. 그중에서도 경계해야 할 사랑은, 사랑을 가장한 집착일 것이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해치는 스토커의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유행어 중에 덕질이라는 말이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정해놓고 펜클럽에 가입하고 공연을 따라다니고 티셔츠를 맞춰 입는 이른바 연예인 사랑이다. 트롯오디션으로 영웅이 된 가수 하나를 오매불망 좋아하는 지인이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덩그런 집에 혼자 남아서 시들어가던 그녀가 그 가수를 좋아하고부터는 생기가 돌았다. 그 가수의 노래를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설렌다고 했다. 좋아할 사람이 생겨서 좋았고, 그 사람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라고 했다.

“내가 일반인을 이렇게 따라다니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스토커라고 신고 할걸. 그렇지만 우린 서로 윈윈 하는 거야. 그분은 팬이 하나 더 생겨서 좋고 나는 마음 놓고 좋아해도 되는 사람이 생겨서 좋고. 먼저 간 우리 남편도 여기까지는 이해해 줄 듯도 하고…”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잘하면 결혼이고, 삐끗하면 불륜이고, 지나치면 스토커가 되는 사랑.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노래와 시를 만들어 냈지만 무작정 덤벼들었다가는 불나방 꼴이 되는 사랑. 그렇게 위험한 사랑을 마음 놓고 해도 무방한 것이 덕질이다. 새로운 사랑의 대상이 생기면 옮겨가면 된다. 이별의 아픔에 울고불고할 것도 없다.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또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노년을 아프게 하는 것은 새벽 뜬눈으로 지새우게 하는 관절염이 아니라 미처 늙지 못한 마음이리라.” 키스를 안 해 준다는 이유로 총기를 난사한 90대 할머니에 대한 외신기사를 보고 이름 없는 시인이 단 댓글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함께 늙지 않는 것이 사랑의 마음이다. 그러니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삭막함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덕질이 필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덕질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이면서도 진득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깊이 담을 수 있는 마음 샘이 있어야 한다. 내가 아직 덕질을 못하는 이유는 진득한 마음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이 사람이 좋을 만하면 저 사람이 좋고,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사람이 나오고, 지고지순한 마음이 없으니 아직 덕질에 입문도 못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나에게도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여름 하늘의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생기리라 기대해 본다.

글 쓰는 창밖으로 벚꽃잎 몇 장 떨어져 내린다. 봄볕에 몸을 맡긴 채 나른하게 떨어져 내린다. 사랑하기 딱 좋은 더없이 눈부신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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