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침묵'으로는 오지 않는
봄 `침묵'으로는 오지 않는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1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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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동틀 무렵 봄비를 만났습니다. 겨우내 바싹 마른 풀잎위로 떨어지면서 바스락거리는 봄비소리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들고 간 우산을 펼 생각은 흐린 하늘 저 멀리 사라지고 맙니다.

아주 조그만 틈새를 비집으며 겨우내 참았던 흐름을 시작하는 개울물 흐르는 소리.

높은 하늘에서 낙하하는 빗방울. 갇히고 닫혀있던 숲속에서 몸을 풀어 크게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내 가까이 이르러 아주 섬세하게 구체화됩니다.

인공의 소리를 제거하면 봄이 결코 `침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잠에서 깬 멧새들의 유난하게 지저귀는 소리로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비로소 느낄 수 있고, 몰입하면 첫 나비가 나풀거리는 소리도 귀에 담을 수 있습니다. 긴장하면 땅이 녹아 부드럽게 바스러지는 소리, 또 그렇게 간격을 넓힌 흙의 틈새를 비집고 새싹이 지면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소리도 들을 수 있겠다는 환청이라도 굳게 믿고 싶은, 마침내 봄입니다.

언젠가 숲속에서 청진기를 통해 들었던 나무들의 우렁찬 흐름의 소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박동하는 생명의 경이로운 힘이었으며, 그날 이후 겸손을 깨닫게 된 것은 봄이 가져다 준 은총입니다.

봄비가 내리고, 시냇물이 소리를 키우며 먼 바다를 향하는 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거시적 `현상'입니다.

봄날 아침, 밟으면 부서지는 묶은 나뭇잎이거나 메마른 몸으로 썩어서 거름이 될 때만을 기다리는 풀잎에 닿는 빗방울 소리는 하나하나가 서로 섞이면서 차라리 경이롭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작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산과 들을 한꺼번에 초록빛으로 바꾸는 큰 그림은 겨우내 제 모습을 숨겨왔던 잎눈들이 두꺼운 껍질을 떨쳐내고 여린 연둣빛으로 저마다의 우주를 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른 봄기운에 용기를 낸 작은 물방울이 틈새를 비집으며 몸을 키우고, 그 박동에 힘을 얻은 또 다른 물방울이 힘을 합치며 도랑으로 흐르다가 시냇물이 되고, 다시 강물로 넓어지는 포용 또한 그 시작은 작은 몸짓이었습니다.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에 닿는 빗물이 제 모습으로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지난해 푸르던 잎들이 제 역할을 다하면서 송두리째 빼앗긴 엽록소가 다시 살아 숨 쉴 수 없고, 흙속에 알을 숨긴 나비들 역시 고치를 뚫어내는 고통을 겪으며 세대를 이어갈 뿐, 지나간 것이 다시 되살아올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곳에 어떤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때 강물은 맑았는지 더러웠는지는 사람만이 기억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 강가에서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고 풍요로웠는지, 혹은 나날이 고통스러웠으며 얼마나 굴욕적이었는지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강가에 살면서 우리의 자유가 얼마나 제한적이고, 우리의 정의와 평등과 평화가 얼마나 법 기술에 의해 왜곡되고 차단되고 있는지. 어쩌다 가진 자들의 탐욕은 갈수록 커지고 막무가내로 보호되는데 노동의 수렁은 도대체 얼마나 깊게 파이고 있는지를 깨닫고 기억하여 `침묵'하지 않을 때입니다.

봄은 침묵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도의 동백과 매화, 개나리며 벚꽃에 이르기까지 봄꽃 또한 결코 혼자 오는 법이 없습니다. 식물과 동물, 세상의 모든 생명은 따듯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그리고 틈을 넓히는 땅의 기운과 촉촉한 물기를 망라하는 공동의 선이 있어 그 박동이 `봄다워 짊'으로 마침내 봄날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봄을 마음만 겨우 들락거리던 겨울의 설움을 떨쳐내고 기꺼이 마음과 손이 함께 움직이는 저항의 계절로 맞이할 일입니다. 껍질을 깨는 소리라도 흉내 내며 `침묵의 봄'을 거부해야 할 때입니다. 반성과 온전한 사과 없는 땅에, 봄은 아직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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