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런 대통령의 시스템 철학
새삼스런 대통령의 시스템 철학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9.17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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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권혁두<부국장(보은·영동·옥천)>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초 "인사 보다는 건전한 시스템을 정착해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말을 했다.

정책이 결정되면 어떤 소수의 판단이나 이권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순항하도록 관성을 갖춘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얘기였다. '3·86 중용'에 대한 반론을 반박하는 의도도 담겨 있었지만, 말 자체로는 설득력이 컸다.

최근 청와대 참모들의 잇단 일탈로 대통령의 시스템 중시론이 무색해졌다. 청와대뿐 아니라 정부부처, 기업, 문화, 종교, 학계. 언론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가 신정아의 화려한 개인플레이에 무너지며 시스템의 완벽한 부재를 드러냈다.

짐짓 권위와 존엄으로 철갑을 친 분야가 오히려 그녀의 공략에 무력했다.

신씨의 전시에 가장 많은 후원금을 내놓은 곳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고등학교 동기들이 당시 수장이었던 기업체와 은행이었다.

두 기관의 신씨에 대한 후원이 예술계에 우호적인 내부 시스템이 아니라, 결정권자의 개인적 판단에 따라 이뤄졌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신씨의 주무대였던 문화예술계도 그녀의 좌충우돌이 나라 전체를 쑥밭으로 만드는 상황까지 오도록 자체 경보등을 작동하지 못했다. 원로의 권위에 묶이고 사소한 이권에 연연해 지하에서만 수군 댈 뿐 겉으로는 쉬쉬하는 데 급급했던 인상이 짙다. 동국대를 포함한 불교계 역시 파당싸움에 날새는 줄 모르다가 신씨 파문의 진원지가 됐다는 세간의 비판을 면치못하고 있다.

특히 언론이야말로 신씨 문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신씨의 사생활까지 추적하며 집요한 취재공세를 벌이는 중앙의 유력 일간지들이 수년 전 큐레이터로 갓 데뷔한 그녀에게 앞다퉈 칼럼란을 내주며 키우기에 바빴던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가짜 학위로 드러난 신씨의 예일대 서양미술사 박사학위 취득을 기사로 다룬 신문들도 있었고, 한 신문에는 신씨의 정체가 드러나기 직전인 지난 6월까지도 신씨의 칼럼이 실렸다.

신씨가 자신을 지원해준 언론에 대해 통크게 보답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최근 한 주간지와 뉴욕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녀가 "기자들이 악마 같다"라고 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까막눈에만 그쳤던 게 아니라 신씨가 야망을 펴나가는 데 일조한 일부 언론이 그녀의 누드사진까지 게재하며 추잡한 취재경쟁에 몰입하는 모습도 시스템의 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시스템을 강조한 대통령의 발언에 공감한 것은, 조직의 요로를 장악한 특정 인맥들이 결정권을 독점하며 시스템을 대체해온 데 대한 거부감이 대통령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한 두명의 결정이 조직과 분야 전반을 좌우하는 독선의 문화와 학연을 매개로 끼리끼리 뭉쳐 담을 쌓고 저희끼리만 주고 받는 저급한 엘리트 문화가 아직도 엄존함을 보여줬다.

변 전 실장과 신씨는 예일대 동문이라는 인연을 통해 관계를 맺고 아낌없이 밀어주는 사이가 됐다. 변씨의 고교 동문들은 '우리는 친구 아이가'하며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금고를 열어 신씨에게 선심을 썼다.

정부 부처, 기업, 은행 등의 공금 집행이 사적 관계에서 출발했지만, 그 과정에서 내부의 공적 제동은 없었다.

이렇게 보면 돌팔매질 당할 대상은 신씨가 아니다. 신데렐라에서 한 순간 성상납 혐의까지 받는 도망자 신세가 됐지만, 신씨는 우리의 허술한 사회망을 노출시킴으로써 소수의 질주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교훈을 남겼다.

대중이 도마에 올릴 대상은 신씨가 아니라 그 잘난 학벌과 연륜, 인맥 등을 밑천으로 국민을 농락한 사이비 엘리트들이다. 구두선에 그쳤을 뿐인 대통령의 시스템 철학이 새삼 생각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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