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차단했습니다
당신을 차단했습니다
  •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수필가
  • 승인 2022.12.2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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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수필가
정명숙 청주문인협회장·수필가

 

여백의 숲과 들판에 눈이 내린다. 습성의 눈은 세상을 모두 덮으려는 기세다. 흰 눈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인적없는 들길, 드나드는 차도 없고 이곳에 주소를 둔 차들은 미리 돌아와 멈추어 섰다.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들고양이들도 조용하다. 적막하고 고요한 풍경, 설국을 표현한 한 장의 그림엽서가 이럴까.

산골에 사는 나는 눈이 쌓이면 도시로 나가는 길이 차단되어 무력해진다. 눈을 좋아하는 사람은 순수하다고 하지만 뒷면을 바라보면 많은 눈은 걱정을 앞세운다. 야누스인 눈이 내리면 인간은 결국 자연의 한 부분이란 걸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약해진 마음에 삶의 뒤안길을 돌아보고 그로 인해 외로움이 밀려오면 깊은 상념에 빠져들고 만다.

12월도 중순을 넘어섰다. 이 계절이 내게 안겨주는 의미는 실로 각별하다. 무언가 아쉽고 짧게 느껴지는, 그래서 부끄러움마저 들게 한다. 한 해의 마무리에 조급증이 생기고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하는 두려움으로 심란하기도 하다. 그동안 만족스럽고 멋지게 보내기 위해 붙잡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열정은 착각이었을까. 지적 욕구에 대한 열망은 본능이며 나이와 상관없다는 신념마저 퇴색되는 것은 아닌지, 생이란 생은 모두 희나리가 되어 하얗게 바래지는데 깊은 인연이라고 변질하지 않고 오래도록 본래의 색을 간직할 수는 있는 건지, 물음표만 무성한데 눈은 수시로 내려 외부와 단절시켜 심란하게 한다. 따듯함이 간절한 계절에 나는 눈도 아니면서 사람과의 단절을 시도했다.

얼마 전 몹시 화가 난 적이 있었다. 병원에 다녀온 그 남자가 말을 하지 않는다. 노심초사하며 눈치만 봤다. 며칠을 보내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걱정할까 봐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마음 졸이며 하고 있던 걱정이 무참해서 감정이 격해졌다. 그에게 나는 차단된 사람이었나. 빙하의 균열 앞에 던져진 기분이 이럴까, 섭섭함을 넘어 분노마저 일었다. 미운 정 고운 정으로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가.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갔으나 이번은 달랐다. 눈길도 주고 싶지 않고 말문도 닫고 전화도 차단했다. 하루가 지나며 화가 잦아들었다. 먼저 물으면 될 걸 속 좁게 탓만 한 것은 아닐까. 온기가 필요한 계절에 차단이라니.

화낸 상황을 파헤쳐 보니 자신의 욕구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나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마음대로 되질 않아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늘 건강할 거라는 믿음이 깨진 것에 대한 황당함, 결코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없는 개별적 존재에 대한 분노였을지도 모른다. 차단은 어이없게 하루 만에 해제되었다.

눈이 쌓이고 길이 미끄러워지면 단절되는 바깥세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아 편안한 듯해도 불안하고 불편하다. 추위의 강도를 높혀가는 바람 사이, 사람과의 단절은 더 쓸쓸하고 적막하다.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 놓고 바람의 세기에 따라 날리는 함박눈, `당신을 바깥세상과 차단했습니다.' 무언의 말이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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