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가을
꿈꾸는 가을
  • 연서진 수필가
  • 승인 2022.10.2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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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연서진 수필가
연서진 수필가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아래층 아이가 탄다. 유치원 아기 때부터 봤는데 어느새 교복을 입고 다닌다. 밝은 갈색의 긴 머리는 굵은 웨이브 펌을 했다. 작은 교복을 힘겹게 껴입고 불퉁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나 중2야.'라고 말하고 있다.

경제적 풍요는 아이들의 신체가 빨리 성장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에 따라 사춘기도 빨라지고 있다. 감정 조절과 정서적 독립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춘기 중2 병의 아이들. 마음의 성장 속도와 몸의 성장 속도가 달라 아이들도 그것을 바라보는 어른들도 혼란스러울 때가 잦다. 밤이면 담배 연기 자욱해지는 어린이 놀이터는 중학생들의 아지트가 된 지 몇 해가 된 듯하다. 그곳의 밤은 욕설이 난무하게 흐르고 있다.

그 무리 틈에 아래층 아이가 늘 있었다. 가을 코스모스처럼 낭창거리고 가느다란 아이는 또래보다 작아 겨우 초등학교 4·5학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그만 아이의 손가락에는 자주 담배가 꽂혀 있고, 입에서는 연신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는 했다.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모습에서 A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십 년이 훨씬 지난 일이다. 커트하기 위해 방문한 A의 어머니는 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무던히 속을 썩이다 미용 고등학교로 전학해 간신히 졸업한 딸이 있는데 내 미용실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때마침 직원을 구하려던 차였기에 A는 나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A의 출퇴근 시간은 들쭉날쭉 요동쳤다. 그나마 친구들과 만나 술이라도 마신 다음 날은 여지없이 결근했다. 곧 그만둘 것처럼 위태위태했으나 A의 입에서 그만 다니고 싶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미용실 원장으로서 특단의 조치를 해야 했다. 정시에 출퇴근하는 것을 지키고, 어길 시에는 지각한 만큼 늦게 퇴근하는 것과 대신 틈이 나는 대로 커트 수업을 하기로 제안했다.

그 뒤로 A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때때로 지각도 했지만 그만큼 늦어지는 퇴근에 군말 없이 약속을 잘 지켜 주었다. 열심히 배우려는 모습이 예뻐 많은 것을 더 알려주게 되었다. 성실하게 노력하며 자신을 성장시킨 A는 그간 거쳐 간 다른 직원들에 비해 빠르게 성장했다. 그 후 작은 미용실을 시작으로 지금은 직원 셋과 함께 일하고 있다.

길을 걷다 강아지와 산책 중인 아래층 아이를 만났다. “안녕, 위층 사는 아줌마야.” 그냥 지나치려다 인사를 했다. 강아지를 만져도 되냐는 나에게 아이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지나칠 줄 알았던 아이는 작은 입으로 종알종알 연신 강아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뜻밖이었다. 배시시 웃는 얼굴은 영락없는 중2의 15살 소녀였다. 요리조리 몸을 틀어가며 수줍은 몸짓을 하는 아이에게서 욕설과 담배 연기를 내뱉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강아지에 대해 생글거리며 전에 없던 모습을 보여주다니. 아이는 어쩌면 마음 내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지독히 밉상스럽다는 중2 병, 아이 엄마는 하는 짓마다 밉다며 걱정했었다. 나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아이들이 그리 예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한 겹의 색안경을 쓰고 보았는지도 모른다. 아래층 아이의 모습에서 A를 보았고, 꿈을 위해 달리던 A의 지난 모습에서 아래층 아이의 가능성도 보았기 때문이다.

눈부신 가을은 꿈꾸기 좋은 계절이다. 푸르던 나뭇잎은 저마다 꿈을 품고 있다. 때로는 비바람에 꺾이고, 뜨거운 태양에 지칠 때도 있었겠지만, 가을이 짙어질수록 결실은 탐스럽게 익어가고 꿈꾸는 시월은 뜨거운 열정으로 붉게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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