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참외다관
청자참외다관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2.09.2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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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지난 10여 년 사용하던 연구실을 조만간 옮기게 되었다. 완전히 옮기는 것은 아니고 건물 리모델링을 하는 몇 달 동안 다른 건물로 이사하였다가 내년 하반기쯤 다시 원래 있던 건물로 돌아오게 된다. 이사의 수고는 얼마 있다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냐는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짐을 싸고 정리하는 그 일 자체에 있다. 이사까지는 아직 두어 달 남았지만 쏜살같이 지나가는 2학기의 특성상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 허둥대기 십상인지라 조금씩 연구실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의 묘미가 이런 것이던가? 감추인 보배를 찾듯 이전에 귀히 여기던 물건을 발견하는 기쁨 말이다. 차(茶)를 마시려면 차도구인 다기가 필요하고 다기는 대체로 도자기니, 차에 관심을 되면 자연스럽게 도자기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하여 연구실에는 차도구는 물론 도자기도 많다. 연구실을 정리하다 값비싼 도자기라도 발견했나 하겠지만, 다도 선생님의 엄중한 당부 덕분에 비싼 도자기는 애당초 내 몫이 아니었다.

그렇다하여 연구실에 귀한 도자기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선생님과 이천이나 여주의 도자기 마을에 자주 방문하곤 했는데 그때 선물로 받은 도자기, 구운 가마를 열 때 싸게 구입한 찻사발, 미리 선생님과 주문하여 맞춰온 다관(찻주전자) 등 귀한 것도 여럿 있다. 이번 정리에서 발견한 것은 참외를 본따 만든 청자 다관으로 다관 손잡이 부분에 참외 덩굴의 어린 순을 멋들어지게 감아올린 작품이었다. 청자의 빛깔도 아름답지만 다복한 참외와 그 줄기를 실감 나게 표현한 것이어서 어여쁜 찻자리에 꺼내어 쓰고는 잘 간수한다는 것이 그만 그 존재를 잊고 말았다.

참외의 자생지는 중국의 화북지방으로 추측되며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참외를 가꾸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외 넝쿨은 끊임없이 뻗어나가면서 계속하여 열매 맺고 또 참외 속에는 무수히 많은 씨앗이 들어 있으므로 참외는 예로부터 다복과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지금은 수박과 참외가 여름의 흔한 과일이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수박은 돈 많은 양반과 부자가 아니면 먹기 어려운 과일이었다. 그러니 우리 민족에게 배고픔과 더위, 갈증을 해소해준 으뜸 여름 과일은 누가 뭐래도 참외였다. 서울의 뚝섬과 시흥, 과천의 참외가 유명했고 충청도 성환에서는 개구리참외가 임금님께 진상하는 참외였다고 한다.

이리 친근한 참외를 본따 만든 참외모양주전자는 10세기 후반부터 14세기 고대시대 후반까지 제작되었는데 연구실에 소장하는 것처럼 청자도 있고 백자도 있고 여러 유약을 섞어 바른 것도 있다. 또한 모양도 다양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참외 모양도 있고 표주박 모양, 석류 모양, 사과 모양의 참외를 표현한 것도 여러 점 있다. 책을 찾아보니 실제로 우리 토종 참외에는 알록달록한 개구리참외, 겉이 노란 꾀꼬리참외, 색깔 검은 먹통 참외, 속이 빨간 감참외, 모양 길쭉한 술통 참외, 배꼽이 쑥 나온 배꼽참외, 유난히 둥그런 수박참외 등 이미 우리에게는 잊힌 다양한 참외가 많았다고 한다. 속이 빨간 멜론을 떠올리며 수박참외나 감참외를 상상해보긴 하지만 그 맛이 어땠을지는 알 길이 없다.

그땐 어려워 죽을 것 같았던 일도 십수 년 흐르고 나면 따뜻한 기억만 남아 웃음이 나곤 한다. 참외모양 주전자를 만들며 다산과 다복을 빌었던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갓난아이를 병으로 잃는 일, 가난하여 밥을 굶는 일,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일 등 어려운 일은 다 잊혔다. 다만 참외모양의 찻주전자만 연구실로 이어졌다. 그 아름다운 찻주전자 뒷면에 얼마나 아프고 쓰린 이야기가 적혀 있을까?

곱고 우아한 옥빛 청자를 감상하고 있자니 시름도 성냄도 다 오간 데 없다.

아름다움이 주는 귀한 선물이 바로 이런 것! 복도에도 교실에도 학교에 아름다운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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