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여자
오래 된 여자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8.2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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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목련
김 혜 식<수필가>

나는 숫자 중 8자가 유독 좋다. 중국인들은 8을 행운의 숫자라고 과신한다고 한다. 나는 그래서 8자를 선호함이 아니다. 그 숫자가 좋은 것은 썼을 때 모양의 균형 때문이다. 숫자 획의 안정된 배치가 좋은 것이다. 또한 8자를 읽을 때 왠지 발음에 힘이 있어 좋다. "팔! 팔!" 8자를 읽을 때 그 소리를 듣기만 해도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이다. 하여 나의 손 전화, 집 전화엔 필히 이 8자가 꼭 들어 있다.

여자인 나도 이렇듯 하다못해 숫자까지 힘 있고 역동적인 것을 좋아한다. 하물며 후각과 시각이 발달한 남자들이야 오죽할까 싶다. 무엇보다 건강미 넘치는 여인의 젊음의 향기와 그 싱그러움에 홀딱 반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젊음은 신선함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젊음은 패기와 무한한 잠재력마저 갖추고 있다. 하지만 풍부한 연륜과 성숙함의 지혜가 때론 삶에 더 필요할 경우가 있다. 온갖 풍상을 겪어온 중년 여인 나름대로의 완숙미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데, 그런 여자의 성숙미를 비하하는 어느 가수의 발언이 물의를 빚고 있다. H. 비처의 '말은 생각을 걸어두는 옷걸이다'라는 그 말을 그는 잠시 잊었었나보다. 여자를 생선회에 비유하는 그의 말에 어느 게스트가 위험한 말이라고 지적하자 "웃자고 한 말이다.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남자들이 신선한 여자를 찾는다. 여자는 신선해야지 오래되면 질려한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이 말이 라디오 전파를 타자 청취자와 누리꾼들이 발끈, 비판의 화살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래 된 여자', 듣기만 해도 괜스레 마음이 서글프다. 어떤 젊은이는 날 보고 '유통기한()이 오래된 여자'라고 했다. 얼마 전 서울 지하철역에서 일이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몇 명의 청소년들이 내 옆에서 귀엣말로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야, 임마 , 네 옆에 유통기한이 조금 오래된 여자 서 있네. 저 여자한테 손 벌려봐." 한다. 나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속으로 '그래, 너희들 말 대로 내가 유통기한만 지냈냐 너희들 같은 자식도 있다'하며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한데 그 청소년들이 넉살좋게 날보고 집에 갈 차비가 모자라니 삼천원만 빌려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그들의 언행이 참으로 괘씸해 부탁을 뿌리칠까 잠시 망설였었다. 그러나나 나도 모르게 모성애(母性愛)가 발동해 오천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선뜻 그들 손에 건네주었다.

그 일을 친구한테 이야기하자 날보고 보기좋게 당했다고 한다. 그 애들은 상습적으로 그런 식으로 행인들한테 돈을 구걸한다는 말이었다. 특히 주로 젊은 여인들보다 애기 엄마나 나이든 여인들을 상대로 돈을 구걸한다는 것이다. 젊은 여인들을 기피하는 것은 아기를 안 낳아본 여자는 모성애(母性愛)가 없어 냉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애들이 날 보고 소위 '유통기한이 오래된 여자'라는 그 막말에 이해가 갔다.

그 청소년들이 생각은 있어서 '오래된 여자'가 '마음이 넉넉하여 너그럽다'라는 것은 인정 하는 듯해 그것으로나마 서러운 자위를 해야 했다.

하긴 '오래된 여자'라고 서러워할 일만은 아니다. 나이는 거저먹는가. 나이에 걸맞게 처신도 해야 하고 두루두루 어른 노릇도 제대로 해야 한다. 나이를 먹으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인격의 잣대가 되기 십상이다. 나이 든 어른으로서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즉 자신의 언행에 전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연령 아닌가.

우매한 내가 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아름답게 늙는 비법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동안 손아귀에 굳게 쥐었던 욕망들을 서서히 풀어서 이웃과 나누는 기쁨이야말로 '오래된 여자'로서의 우아한 기품을 지니는 일임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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