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學歷)만 따지는 사회
학력(學歷)만 따지는 사회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7.27 23: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 을 석 초등위원장 <전교조충북지부>

대학시절 어쭙잖게 학보사 기자를 하면서 동인지(同人誌) 관련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지역의 동인지를 찾아보고 소개하는 기획기사였는데, 문학에 관심도 있는 터라 딴에는 꽤 재미를 맛보면서 취재에 임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알게 된 이야기 한 편이, 최근 문득 뇌리에 다시 떠올랐다. 그 까닭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학력(學歷)위조니 뭐니 하는 파문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부산일보라는 신문사에서 기자를 공개채용 모집을 했는데, 나중에 '열린시'라는 동인지에 시인으로 참여하여 왕성한 활동을 벌였을 뿐 아니라, 연극분야에서 최고예술가 상을 받는 등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이윤택이라는 분이 응모를 했더랬다. 헌데 신문사쪽에서 당신은 자격이 안 되니 나중에 자격을 갖춘 다음에 응하라고 했다.

이유를 캐물으니 "당신은 학력(學歷)이 미달이다. 우리는 대학졸업자 이상의 학력(學歷)을 원한다"고 답했다. 이분은 "나는 어떤 대학졸업자 못지않은 학력(學力)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응시자격이 있다. 신문사에서 공고를 낼 때 학력을 한글로만 표기하지 않았느냐 잘못은 신문사쪽에 있다. 학력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결과를 보고 판단하라"고 박박 우겼다. 마지못해 신문사는 응시자격을 부여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연일 언론은 학력(學歷)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국제비엔날레 최연소 예술감독이었던 모대학 교수는 미국 대학의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위조했다.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는 영국의 석사 학위를 사칭했다. 내로라하는 만화가는 국내 유명대학 졸업이 아니라 고졸임을 양심고백했다. 경찰은 학원 강사들의 학력(學歷)위조 문제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오늘 또 다시 유명 개그맨이자 영화감독이 학력(學歷)을 속였다는 기사가 나왔다. 어떤 분야의 전문인으로 활동을 하는 데 있어 졸업장이 결코 전부일 수 없다. 학위가 필요충분조건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일련의 소식들은 학력(學歷)을 속여야 입문할 수 있었고, 학력(學歷)을 속이는 순간 모두들 실력을 인정했던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나, 예일대 나온 박사야. 이 한마디에 모두 넘어갔다. 엎드려 모셨다"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기사에 등장했다.

우리 사회는 확실히 실력에 앞서 졸업장과 학위를 요구할 뿐더러 실력보다 더 인정하는 사회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그렇기에 '학력(學歷)을 속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을 맡아야 한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실력은 인정해야 한다'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일 게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실력이 당신을 말합니다'라는 광고카피는 호소력이 없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학력(學歷)은 '학교를 다닌 경력'이다. 어느 학교를 다녔느냐, 얼마나 다녔느냐를 말한다. 그리고 또 학력(學力)은 '교육을 통하여 얻은 지식이나 기술 따위의 능력. 교과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학력(學歷)과 학력(學力)을 겸비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마는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무엇을 고를 것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이미 지식과 기술은 대학교 안에만 갇혀 있지 않다. 배우는 곳은 사방에 널려 있다. 실력은 도처에서 기를 수 있다. 그럼에도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얼마나 상위의 학위를 가지고 있느냐만 따지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학력(學歷)이 없어도 당당히 인정받고 존경받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 '교과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만으로 인정받는 학력(學力)사회는 아직도 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