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든 때의 더께
찌든 때의 더께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21.10.0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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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이창옥 수필가

 

기다리던 비가 시원하게 내린다. 이 비가 그치면 가을이 한층 더 깊어지리라. 베란다로 나가 서둘러 탁자를 거실로 옮겨놓고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수를 늘이고 물을 틀었다. 물이 시원하게 쏟아진다. 솔과 수세미로 창틀의 찌든 때를 닦기 시작했다. 아파트 앞이 도로변이라 그런지 매연에 찌든 먼지가 창틀에 많이 쌓인다.

각종 미세먼지가 14층 아파트 창틀에 쌓이면 틈틈이 물걸레로 닦아내도 개운하지 않아서 가끔 오늘처럼 빗줄기가 굵은 날을 기다린다. 이런 날에는 베란다 물청소를 해도 이웃집들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혹여 비가 그치면 낭패일까 열심히 솔로 문지르고 수세미로 닦아내고 물로 뿌려가며 방충망에 먼지까지 씻어 냈다. 창틀에 쌓인 검은 먼지가 세찬 물살에 깨끗하게 씻겨져 나가는 것을 보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시원하고 상쾌해진다. 더불어 옆의 반려식물들에게도 물을 뿌려 씻어주니 베란다에 싱그러움이 넘실댄다.

한동안 이러저러한 일들에 부대껴 바쁘다는 핑계로 반려식물들에게 소홀했었다. 오랜만에 물로 먼지도 닦아주고 마른 잎도 정리해주고 나니 그동안 소홀해서 미안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나름 나는 괜찮은 반려인인척 반려식물들과 눈 맞춤을 하며 생색을 내다가 피식 웃으며 슬그머니 생색내기를 그만두었다.

이런걸 보고 도둑이 제발저리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청량함으로 가득한 베란다 정원을 보니 기분이 덩달아 산뜻해지고 좋아졌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오랜만에 기분 좀 내려고 탁자 위에 유리 찻주전자를 꺼내 올려놓았다. 평소에는 조심스러워 잘 사용하지 않는 유리주전자지만 가끔 뜬금없이 분위기를 내고 싶어질 때면 차를 우리며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새순을 잘라 말려둔 로즈메리 잎을 주전자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맑았던 물이 서서히 푸르게 번지며 로즈메리향이 은은하게 베란다 정원에 퍼진다. 투명한 유리주전자는 찻물이 우러나며 퍼져 나가는 모습을 감상하는 묘미가 있어 좋다. 로즈메리의 향기와 더불어 연푸른빛으로 번져가는 찻물을 바라보노라니 나의 온몸에도 푸른 향기가 돌고 있는 것처럼 상쾌해진다. 더불어 마음의 찌든 때도 씻겨나가는 듯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창틀을 닦아내고 반려식물들을 씻기고 차를 마시며 나의 마음속에 찌든 때도 깨끗하게 정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짧은 순간이지만 한다. 눈에 보이는 먼지나 찌든 때는 오늘처럼 물이나 걸레로 닦아내고 씻어내면 깨끗해지지만 사람 마음속에 쌓여 있는 찌든 때는 쉬이 청결해지지 않으리란 사실에 잠시 생각이 멈춘다. 내 마음속에 찌든 때는 얼마나 쌓여 있을까. 도저히 찌든 때의 더께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마음을 갈고 닦으면 살아왔다고 자부했으나 어쩌면 오랜 세월 깨끗한 척, 순수한척, 정직한척, 온갖 척을 하며 가면을 쓰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가을은 한층 더 깊어지고 하늘은 높고 청량해지리라. 구름 한 점 없이 눈이 시리게 푸른 가을 하늘 아래에서 나는 내 마음을 가늠하고 또 가늠하며 들여다볼 테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아 놓은 찌든 때의 더께가 얼마나 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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