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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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1.07.1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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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새벽 5시 밭으로 간다. 가장 바쁜 수확 철이기 때문이다. 1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 자욱한 안개가 반긴다. 맑은 새소리가 숲을 깨우고 신선한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보랏빛 얼굴에 분칠을 살짝 한 블루베리나무가 가지마다 통통한 열매를 달았다. 한 알의 열매에는 남편의 수고가 고스란히 담겼다. 연일 내리쬐는 뙤약볕과 은은한 달빛도 여기 머물렀다.

우리 밭에는 여러 가족이 함께 산다. 땅속에는 개미, 지렁이, 개구리를 비롯해 많은 생명이 산다. 먹잇감이 넉넉한 이곳에 터를 잡고 연일 굴을 뚫는 두더지가 우리에게는 제일 큰 불청객이다. 베리가 농익어 달콤한 향을 풍기면 새들도 가족들을 이끌고 찾아온다. 평소에 예뻐 보이던 새들도 이때만큼은 얄밉다. 애써 가꾼 열매를 가장 크고 잘 익은 것만 골라 쪼아 먹으니 야속하기 그지없다.

남편은 두더지와 한 판 승부를 시작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종류의 두더지 퇴치기를 설치해도 별 소용이 없자, 땅에 진동을 주기 위해 수십 개의 바람개비를 세웠다. 형형색색 돌아가는 바람개비는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두더지를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놈은 보란 듯 더 넓은 땅속을 헤집고 다니며 지렁이 사냥에 열중했다. 급기야 뿌리에 바람이 들고 말라 죽는 나무가 늘었다.

궁리 끝에 남편은 쇠기둥을 밭 곳곳에 세우고 한쪽 날개를 제거한 환풍기를 여러 대 매달았다. 탁 타다닥 타다닥…. 환풍기는 요란하게 돌며 쇠기둥을 때렸다. 소리에 민감한 두더지가 땅속 울림으로 더는 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남편의 설명이다. 쇠기둥과 환풍기의 불협화음은 음악을 대신하고 있다.

5년 전, 산비탈 우리 밭은 호미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가뭄이 들었다. 물을 좋아하는 블루베리는 하루 한 번 뿌리가 흠뻑 젖을 만큼 물을 줘야 하는데 먼지만 풀풀 날렸다. 하늘만 바라보며 속을 태우던 남편은 커다란 물통을 트럭에 싣고 물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오르막에선 물통의 무게 때문에 자동차 앞바퀴가 들리곤 했다는 말에 가슴을 몇 번씩 쓸어내려야 했다. 그렇게 나무 가꾸기에 열중이던 남편인데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어쩔 수 없이 밭을 남에게 임대했다. 2년이 지나자 임차인은 농사는 힘 드는데 소득이 적다며 계약을 파기했다. 직접 농사를 지어보겠다며 밭을 둘러보고 온 남편은 실망이 컸다. 죽은 나무도 많고 살아있는 나무도 생기가 없더라는 것이다.

남편은 병든 나뭇가지를 자르고 더러는 옮겨 심으며 나무를 가꾸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우듯 죽어가는 나무에 온 정성을 다했다. 매주 농업기술센터에서 미생물을 가져와 땅의 힘을 돋우고 게르마늄을 사용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꾼 나무는 7년생으로 이제 성년이 되었다.

그 정성에 보답하듯 나무는 가지마다 실한 열매를 달았다. 땅속 환경이 좋아지자 더 많은 지렁이가 찾아들었고, 땅이 비옥해지자 나무도 힘을 얻어 잎이 무성해졌다. 죽어가던 나무가 생기를 찾는 동안 남편의 건강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하루에 두 시간씩 작업하던 시간이 길어졌으며 식사량도 늘어났다.

오늘도 우리는 새벽길을 달려와 열매를 딴다. 땅에 닿을 듯 늘어진 나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숨은 보물을 찾듯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살피면 그곳에는 영락없이 굵고 잘 익은 열매가 가득 달렸다. 통통한 열매를 따는데 고마움과 간절함이 한데 섞여 차오르고 나는 희망을 생각한다. 세상에 흙만큼 가리지 않고 온갖 생명을 다 길러내는 존재가 또 있을까. 땅속의 많은 생명을 키우는 동시에 생기 잃은 나무까지 살려낸 땅. 이 땅과 함께라면 남편도 이 블루베리 나무처럼 건강해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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