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조연(助演)’
찬란하게 빛나는 ‘조연(助演)’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4.2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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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한국'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식을 전한 아침 신문을 훑어보다 여러 매체에서 적지 않은 오자(誤字)를 발견했다. `조연'을 `주연'으로 표기한 것인데, 이 뜻밖의 실수가 씁쓸하다.

1등만 고집하는, 또 1등만 기억하는 한국사회의 모진 서열에 대한 탐욕이 은연중 나타나면서 `조연'을 `주연'으로 착각하는 것조차 당연시하는 건 아닌지, 신문의 오자를 통해 돌아보게 된다.

넘치는 축하는 당연하다.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커다란 획을 그었다는 찬사는 전혀 과분하지 않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쾌거에 이어진 경사는 문화가 강한 나라로서 한국을, 그리고 화이트로 뒤덮였던 아카데미의 무채색 우월성에 마침내 다양한 색깔을 입히는 진화를 꿈꾸게 되었다는 것은 마땅히 고무적이다.

중요한 것은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이 마침내 주인공이 아니라 2등이어도 충분히 함께 기뻐할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을 한국 사회에 심어줄 수 있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은메달을 따고도 올림픽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이는 한국 선수들의 서글픈 모습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성숙한 사회를 기대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수상이 2등 가운데 차지한 당당한 1등이라는 사실에 환호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떨쳐버릴 수 없다.

물론 주인공은 1등이고, 조연은 2등이라는 논리가 해괴하고 말도 안 되는 궤변이며 차별적 발상이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런 구분이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지나친 경쟁과 일그러진 능력주의와 함께 서열에 따른 계급과 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이 된다는 것도 모르는 바 아니다.

성실한 조연 없이는 빛나는 주연은 있을 수 없고, 탄탄하게 이야기를 지탱하고 견뎌내는 조연 없이 찬란한 집단예술이 탄생하는 일은 드물다.

다만 영화 <미나리>를 통해 우리가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한국인'이라는 민족성에 지나치게 경도되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나도 <미나리>를 일찌감치 극장에서 봤다. 미국이라는 미지의, 그리고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나라에서 한국계 감독이 한국 배우와 한국계 배우를 통해 낯선 이국(異國)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그저 `한국적'일 뿐이어서 토착 한국인에게는 오히려 이질적이다.

낯선 나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그것도 성공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함은 외래 씨앗 `미나리'뿐만 아니라, 원산지 고향을 떠난 모든 생명의 모진 정착과 다를 것 없다. 그러므로 <미나리>를 오롯이 한국영화로 고집하고 싶은 욕망은 이 영화가 추구하는 보편적 서사를 위축시키는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에서 차라리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수상소감 “사랑하는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는 말이다. 나는 윤여정의 이 말에서 일흔네 살 노배우의 관록이 우러나오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소중하고 강한 메시지를 읽는다. “절실해서 연기를 했고, 정말 먹고살려고 연기를 했다.”며 절절한 진심을 더한 윤여정의 수상소감은 `영끌'을 불사하면서 부동산에 절규하고 가상화폐에 빠져 불로소득에 탐닉하는 이 땅의 청춘들에게 향하는 통쾌한 경종이다.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거나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무지개처럼 모든 색을 합쳐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따듯하고 같은 마음을 지난 평등한 사람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윤여정의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마음.

상을 받는 윤여정의 모습에서 1등을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그렇다고 조연 역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국의 처지가 떠오른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트로피가 3년 전처럼 판문점에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빛으로 남는 꿈. 세상의 모든 탐욕과 불평등을 몰아내고 땀으로 만들어지는 조연 윤여정의 찬란하게 빛나는 무지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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